살아가는 이야기

공지영-지리산이야기

깜보입니다 2010. 10. 15. 09:36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32) 지리산 행복학교의 저녁풍경

 공지영 | 소설가
ㆍ“바람도 아닌 것에 뒤척이기 싫어서 나는 도시를 떠났다”

그렇게 학교가 시작된 이후 지리산 자락 마을엔 몇 가지 변화가 생겨났다. 우선 기타를 메고 다니는 사람은 숫자가 부쩍 늘어났고 꽃이 피거나 안개가 끼는 날이면 강가나 산 어귀에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사람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카메라 비쌀 텐데 어떻게 구입했어?” 물으면 그들은 씩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기는 이들은 극빈자들이 아니라 터무니없이 비싼 집값을 물고 사는 도시의 삶을 거부했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속내를 알고 보니 중고장터에서 나오는 것을 알음알음으로 싸게 사서 쓰는 모양이었다.

섬진강변 코스모스길 | 이원규 시인 촬영

 

한번은 최도사가 드디어 휴대폰을 들고 나왔다. 깜짝 놀란 내가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친한 친구가 하도 답답해서 사준 것”이라고 했다. “연봉 200만원에 휴대폰 통화료가 버겁지 않아?” 내가 물으니 최도사가 대답했다. “그래서 여기 지리산 사람들 서로 전화 잘 안 해. 정 할 말 있으면 찾아가지. 것도 힘들면 문자 메시지로 하고 그래도 사용료가 밀리면 발신 정지가 되는데 그러면 좋지, 어차피 오는 전화만 받으니까 말이야. 그러다가 더 있으면 이제 수신마저 정지되는데 그때는 어떻게든 마련을 해서 조금 전화비를 내야 해. 우리에게 수신은 중요한 거야. 그래야 술이라도 얻어먹고 사니까.”(통신사 관계자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이들이 사용료를 떼어먹는 사람들은 아니고 조금 늦게 낼 뿐이니 너그럽게 양해해주실 것으로 믿는다.)

그러면 술은 누가 낼까? 이들은 그냥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먹는다고 하는데 그 말이 그리 틀리지도 않다. 한번은 어떤 분이 “꽁지작가님 우리 집에서 꼭 저녁을 드셔야 해요” 하기에 부담스러워서 피하려다가 그분이 하도 정성껏 권하기에 그 집에 갔는데(가면서 예의상 혹시나 하고 지리산 흑돼지고기와 막걸리를 좀 샀다) 정말 아무것도 준비해놓은 것이 없었다. 좀 당황스러웠다. 그러자 그분은 태연하게 “그럼 이왕 사오셨으니 이 삼겹살을 굽죠 뭐” 하고는 그제서야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 집 마당 평상에 앉아 있으니 시장하실 텐데 우선 드시라고 민들레김치와 열무겉절이를 막걸리 안주로 내오는데 무어라 말할 수 없이 편안하고 고즈넉했다. 호들갑을 떠는 접대 말고 그냥 설렁설렁 마실 온 기분. 그날 민들레김치 위에 날리던 흰 자두꽃잎들, 멀리 지던 살구빛 노을… 젖빛 막걸리가 어우러진 소박한 술상 앞에서 나는 오랜만에 정말이지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농사를 짓고 돌아온 그 집의 바깥주인은 “오셨어요?” 하더니 뒤뜰로 가서 무언가를 한 줌 쥐고 나왔다. 그의 손에는 표고버섯이 한 줌 들려 있었다. “구워 먹든지, 이따 된장에 넣든지. 제가 재배하는 거예요” 하는 것이다. 그러더니 그 집 안주인이 뒤채를 서성거리면서 “여보, 여기 돌미나리가 잔뜩 자랐다. 쌈 싸먹게 좀 뜯어줘” 하는 것이었다. 상추나 치커리, 토마토, 희귀하게 재배한 피망도 대접받아 본 적이 있지만 표고버섯과 돌미나리를 그 자리에서 대접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날 결국 낙장불입 시인이 강남좌파형과 바이크를 타고 읍내에 나가 흑돼지고기를 두 배쯤 더 사오게 되었다. 이사람 저사람 모여들었고 그러니 젓가락 하나씩을 더 쥐여주게 되었고 그렇게 술과 저녁식사가 나누어지고 있는 것이 이 지리산의 저녁 풍경이니까 말이다. 이쯤이면 이 지리산 자락에 자주 들리는 꽁지작가와 강남좌파형이 흑돼지 천사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실은 우리보다 더한 강적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는 회 천사였다.

고아르피엠 여사가 그를 처음 대면한 것은 ‘지리산학교’ 교무처에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목소리는 좀 노쇠했고 지쳐보였다. 그는 자신을 여수에 살지만 늘 지리산을 바라보며 사는 한 사람이라고만 소개하면서 대뜸 혹시 낙장불입 시인의 연락처를 알 수 있는지, 그리고 혹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주선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다시 덧붙였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제가 학교와 낙시인을 후원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고아르피엠의 머리 속으로 이 순간 수많은 영화·드라마·소설·연극·콩트가 지나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70대 후반, 병실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백만장자. 아니 꼭 백만장자는 아니더라도 나름 자수성가한 상당한 재산가. 그는 실은 지리산의 파르티잔 출신임을 숨기고 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에게는 혈육이 없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문이나 꽁지작가의 글을 통해 낙장불입 시인의 내력을 파악했고 이제 죽기 전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리산 마지막 전투의 비밀 몇 개를 털어놓고 낙시인에게 그 글을 부탁한 후 전 재산을 파르티잔의 아들이며 지금은 지리산을 지키는 낙장시인에게 물려주려 그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아!

그리하여 고아르피엠은 급하게 대답했다. “뭐 어려울 것 없어요, 제 남편이니까요.” 며칠 후 그가 지리산 학교로 찾아오기로 한 날 고아르피엠은 오랜만에 얌전한 스커트를 입었다. 그게 평생을 지리산에 모든 것을 바치고 이제 다시 지리산의 품으로 돌아오려는 노인에 대한 예의 같아서였다. 그런데 찾아온 사람은 젊어서 좀 고생을 했는지 겉늙어 보이긴 했지만 남편과 거의 비슷한 연배의 새파란(그가 새파랗게 젊은 것이 아니라 상상했던 70대 노인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남자였다. 그는 밝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다 말고 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요즘 목감기가 어떻게나 심하던지. 제가 전화했던 그 사람입니다” 하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대뜸 “제가 갯가 사람이라 뭐 선물을 드릴 게 없어서 회를 조금 가져왔는데 선생님들은 어디 계신지요. 여기 학생이 70명이라고 해서 회를 70인분 장만해 왔는데.” 그가 가리킨 사륜구동 차의 뒷좌석에는 얼음에 채워져 보랭 처리된 회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철은 봄날이었다. 해는 낮이 되면서 더 따뜻해지다 못해 뜨거워지고 있었다. 고아르피엠은 마음이 급했다.

“그게 여기가 학교가 아니고 우리 학교는 한 군데가 아니고 70명이 한꺼번에 모이는 게 아니고…. 그런데 그래서 도로 가져가시면 안되고 아무튼 먹어야지요. 귀한 건데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먹어야지요.”

그날 악양에서는 때 아닌 회 잔치가 벌어졌다. 이렇게 먹고 저렇게 먹고 나중에는 그 귀한 것을 튀겨도 먹고, 찌개에도 넣어 먹고도 몇 상자가 남았다. 그것은 식구 많은 집의 냉동실로 들어갔다. 그 후로도 그는 지리산학교의 행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여수에서 회를 날랐다. “좀 바보 같은 질문이긴 하지만 왜 그러세요?” 내가 묻자 그는 “꽁지작가는 왜 여기 와서 흑돼지 사고 소주 사요?” 물었다. “그거야 우린 친구니까….” 내가 대답하자 그가 웃었다. “저도 친구예요. 게다가 우리 셋은 동갑이 아닙니까?” 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자수성가해서 지금은 큰 기업체를 꾸리고 있는 그가 왜 지리산을 늘 바라보며 살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대책 없고 셈 못하는 사람들, 서울 정계에서 실용을 중시한다는 자들의 눈으로 보면 낙오된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그가 왜 싱싱한 회를 새벽시장에서 주문해서 손수 이곳까지 날라 오는지 나는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힘이 들고 지치고 문득 서러울 때 무작정 길을 나서서 그들에게 달려가는 이유와 같을 것이었다. 가서는 고개를 흔들며 “내가 못살아. 왜 이렇게 게을러? 왜 그렇게 비합리적이야” 지청구를 주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알고 있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곳. 설사 내가 모든 것에 실패한다 해도, 설사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받는다 해도, 설사 어느 날 내 인생이 이게 뭐야 마음속으로부터 절규가 불길처럼 뿜어져 나온다 해도, 외양간은 텅 비고 과일나무는 쓰러지고 산야가 불타버린다 해도, 그곳을 생각하면 세상에 무서운 게 없고 흐뭇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50만원만 있으면 될 거야. 그러면 1년치 집세를 내서 집을 얻고 그리고 젓가락이 있으면 돼.”

학교가 끝나면 그들은 형제봉 아래 있는 형제봉주막집으로 간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타향을 떠돌던 사내가 중년이 되어 중학생 아들 손을 달랑 잡고 고향으로 돌아와 구판장을 리모델링했고 거기에 ‘형제봉주막집’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 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제 고향에 있고 그는 이제 수많은 정다운 이웃에게 둘러싸여 있으니까. 술자리의 시작은 성서구절처럼 미약하다. “안주 고르시죠. 여기 메뉴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끝은 창대해서 이제 주인도 취하고 객도 취하고 안주는 계산도 없이 넘치고 기타는 울리고 노랫소리는 드높아 밤을 지새우게 된다. 나는 그 모퉁이에 앉아 누군가 해놓은 낙서를 읽었다.

“바람도 아닌 것에 뒤척이기 싫어서 나는 도시를 떠났다.” 내 등으로 전율이 다 지나가기 전에 버들치의 반주가 시작되었고 낙장불입이 자신의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이미 안치환이 곡을 붙였던 그의 시였다.

“그대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서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 철쭉꽃 길을 따라
온 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오지 마시라.”

< 연재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