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남해 금산

깜보입니다 2010. 10. 25. 09:02

남해 금산

 

새 왕조를 갈망했던 이성계는 군부와 신흥사대부를 정치적 기반으로, 도참사상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비결(秘訣)에 의지해 전국의 기도처를 순례하며 조선 개국을 하늘에 빌었다.

관악산, 도봉산을 비롯한 수도권 명산은 물론 계룡산, 천관산까지 그의 기도 흔적은 팔도 곳곳에 어려 있다. 고려 말엽 이성계는 남해 금산을 찾아 새 왕조를 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임금이 되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100일 기도 끝에 그는 조선 건국의 꿈을 이루었다. 태조는 진짜 비단 대신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錦山)이라는 이름을 내려 받들게 했다.

# 화려한 풍경 뒤엔 김만중의 아픔이

금산(681m)은 일찍부터 삼남(三南) 제일의 명산으로 꼽혀 왔다. 온갖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닮았다 하여 ‘남해 금강’으로 일컬어졌고 갖가지 기묘한 형상의 바위군(群)들이 바다와 어우러져 해안절경의 명소로 이름이 높다.

금산의 화려함 뒤에는 우수 깃든 사연도 있다. 금산은 옛날 유배지의 상흔이 서린 곳이다. 서포 김만중은 숙종 때 장희빈을 둘러싼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가 남해의 노도(櫓島)에 가극안치(加棘安置) 형벌을 받는다. 이 벌은 가시울타리 안에서만 거주하는 일종의 가택연금. 서포는 정치적 울분을 창작열로 달랬다. ‘서포만필’과 ‘사씨남정기’가 유배 중에 완성됐다. 조선 초기 4대 서예가로 꼽히는 자암(自庵) 김구(金絿)도 기묘사화의 정쟁에서 밀려 남해에서 청춘을 보냈다. ‘화전별곡’(花田別曲) 같은 역작들이 이때 쓰여졌다. 그는 문집에서 남해를 ‘한 점, 신선의 섬(一點仙島)’이라고 묘사했다. 단 4자로 남해 비경을 멋지게 요리한 필력이 돋보인다.

남해 금산 산행은 지금이 적기다. 무채색 천지인 겨울 산에서 벗어나 색(色)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해의 송림과 푸른 바다의 컬러풀한 조합에서 겨울의 우울을 털고 상륙을 서두르는 봄을 온몸으로 맞을 수 있다.
취재팀은 복곡저수지에서 보리암으로 들머리를 잡았다.

암자 근처까지 버스가 운행되지만 산꾼들의 자존심상 케이블카나 셔틀버스는 사양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덕분에 호젓한 산길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편백과 동백, 송림이 우거진 도로를 따라 1시간쯤 걸으니 어느새 정상이다. 시원한 해풍 속에서 다도해 전경이 실루엣으로 펼쳐졌다. 녹색 물결을 이룬 논밭 사이로 항아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이 해무 속에서 정겹다.

# 명승 38경, 고려시대 봉수대 남아

금산은 한려해상공원 내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주봉인 망대를 중심으로 좌우에 기암괴석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있다. 암봉과 암자, 송림, 다도해의 조화는 어느 한구석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균형미를 자랑한다. 다른 지역에서 8경, 10경에 그치는 명승들이 여기선 자그마치 38경에 이른다. 그래서 금산을 ‘산계(山界)의 미스코리아’로 부른 문인도 있다.

바로 밑 망대에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봉수대가 그대로 남아있다. 여수에서 온 신호를 진주로 연결했다고 한다. 남해에서 한양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4시간 30분 정도. 휴대폰 한방으로 전국이 커버되는 오늘날에 비하면 턱없이 느리지만 당시에 승용차 속도와 맞먹는 비상연락체계를 보유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금산은 또 다양한 전설과 이야기의 창고다. 주봉인 망대를 중심으로 문장봉, 쌍룡문, 상사바위, 삼불암 등 기암들이 각기의 전설과 사연을 품은 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상에서 산죽 길을 따라 10분쯤 내려오면 보리암이 나온다. 구불구불 각이 진 계단을 느린 걸음으로 걷노라면 암자 추녀의 선(線) 끝으로 쪽빛바다가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이곳에는 중생의 소리까지 본다는 관음(觀音)보살이 모셔져 있다. 인자한 미소와 원만한 눈매는 기도객들의 소원을 낱낱이 헤아리고 있는 듯하다. 해수관음보살 옆에는 고려 초기 양식의 3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에도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다. 기단 위에 나침반을 올려놓으면 바늘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자기난리(磁氣亂離)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 과수댁 마님 연모한 머슴 전설 전해

저두암과 코끼리바위 아래에 있는 금산산장을 지나면 금산에서 가장 전망이 뛰어나다는 상사바위가 나온다. 이곳은 높이가 80m로 아파트 30층 높이다. 이 바위엔 ‘과수댁 마님을 연모한 머슴이 상사병이 들어 죽을 지경이 되자 마님이 이 바위로 몰래 불러 상사(相思)를 풀어 줬다’는 전설이 전한다. 보통의 상사바위들의 결말이 동반투신의 비극에 이르는 데 비해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경치만큼이나 감미롭다. 당시의 애틋한 로맨스와는 무관하게 수많은 관광객들은 수다를 떨며 각자의 유흥에 바쁘다.

연무에 싸인 다도해를 바라보니 금산을 소재로 만들었다는 ‘밤배’가 오버랩된다. 둘다섯의 멤버였던 이두진씨는 1973년 보리암에서 머물다 밤바다의 정경에 반해 그 자리서 이 노래를 작곡했다고 한다. 최근엔 상주해수욕장에 노래비까지 세워져 금산의 운치를 더한다.

산의 서남쪽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부소암이 있다. 이곳엔 진시황의 아들 부소(扶蘇)가 유배되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우연인지 금산에는 중국 진시황의 방사(方士)였던 서시(徐市)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새겨 놓았다는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석각이 새겨져 있어 두 전설의 연결관계에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취재팀은 상주해수욕장 쪽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돌계단을 따라 급경사길이 이어진다. 보리암 바로 밑에서 쌍홍문(雙虹門)이 시원한 바람길을 내주며 일행을 배웅한다. 쌍무지개라는 뜻을 가진 이 문은 높이만 7, 8m에 이른다. 바로 앞의 장군바위도 늠름한 위용으로 굴을 드나드는 관광객들을 굽어본다. 시인 이춘하는 장군바위에 올라 ‘장엄과 파계의 허물어지는 경계를 본다’고 읊조렸다.

바위인들 세상에 소회가 없으랴. 아마도 저 바위는 무수한 세월 동안 온갖 군상을 보내고 또 맞았을 것이다. 이성계의 기도 행렬, 머슴과 과수의 로맨스, 서포의 고달픈 유배생활까지 멀리서 지켜보며 애환을 같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람 한 올, 그늘 한 자락밖에 보탤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면서.

출처 : 건강 1004
글쓴이 : 蘭谷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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