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을은 어디인가

깜보입니다 2011. 1. 18. 09:55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을은 어디인가- 청담 이중환과 『택리지』
1700년대 중엽 어느 날 귀양지에서 풀려난 이중환(1690~1752?)은 기약 없는 전국 방랑길에 올랐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을을 찾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중환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얻은 결론은 전국 어디에도 살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중환은 『택리지』 안에 묘한 말을 남겼다. ‘살아있는 눈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글자 밖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스스로 수양을 잘하면 자신이 사는 곳의 인심이 좋은지 나쁜지는 따질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이중환이 전국을 다니면서 얻은 결론은 살만한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본 것은 아니었을까?

1700년대 중엽 어느 날 귀양지에서 풀려난 이중환(1690~1752?)은 기약 없는 전국 방랑길에 올랐다. 갈 곳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마을을 찾겠다는 목적만은 분명했다. 지금은 방랑객 신세이지만 사실 그는 남인에 속하는 여주이씨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참판을 지냈고 자신 또한 24세 때 증광시 문과에 급제한 뒤로 여러 벼슬을 거쳐 33세에는 병조정랑을 지내기도 하였다. 더구나 실학파의 거두 성호 이익의 집안 손자뻘로서 이익보다 아홉 살 아래이지만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뛰어난 학자였다. 하지만 그를 오늘날 이런 모습으로 만든 것은 당쟁이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작은 소망 『택리지(擇里志)』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왕위를 이었을 때 노론들이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왕세제에 책봉했는데, 뒷날을 걱정한 소론들은 노론이 왕세제를 끼고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뒤 얼마 안 가 영조가 즉위하면서 이 사건이 모함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소론들이 탄핵을 받았는데, 이중환 또한 고변하는 자들에게 말을 빌려준 것이 문제가 되어 36세 나이로 먼 섬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고 곧바로 다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또 귀양길에 올랐다.
그 뒤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집안이 완전히 몰락해버린 탓에 그 자신의 표현처럼 농부나 채마밭 지기가 되고 싶어도 땅 뙤기 한 줌 없을 뿐 아니라 살 집조차 없었다. 심지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전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년이 얼마나 곤궁했을지 짐작이 된다. 그러나 그의 등을 떠밀어 당쟁 없는 마을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전국을 떠돌게 만든 그 가난과 불우한 생애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를 낳았다.

『택리지』는 『논어』 「이인(里仁)편」 첫머리에 나오는 ‘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 말은 ‘마을 사람들이 같이 어우러져 사람답게 사는 것이 참 보기 좋으니 그런 마을을 택해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고 하겠는가?’라는 뜻이다. 당쟁의 피바람에 밀려나 갈 곳 없이 헤매던 그의 작은 소망이 잘 담긴 제목인 셈이다.

『택리지』는 아마도 1751년 이중환이 죽기 한두 해 전 초여름에 정리된 듯하다. 이 책은 ‘택리지’ 외에도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8도의 정보를 담았다는 뜻에서 『8역지(八域地)』라 불렸고, 8도 가운데 살만한 곳을 적은 책이라 해서 『8역가거지(八域可居志)』로도 불렸다. 또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담았다는 뜻에서 『동국총람(東國總覽)』이라고도 했고, 우리나라의 산과 들을 말한다는 뜻에서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이라고도 했으며, 각 지역의 물자와 경제를 모두 망라했다는 뜻에서 『총화(總貨)』라고도 불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름만큼 그 용도가 다양하다. 각 지역의 객관 조건을 기록한 지리지인 동시에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담은 역사서였다. 또한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구분한 풍수지리서였고, 지역의 경관을 논한 산수록이었다. 그런가 하면 숨어살거나 전쟁이 났을 때 피신할 수 있는 정보를 담은 책이면서 전국 팔도에서 나오는 물건을 기록한 경제서였다.
특히 이 책은 지리적 환경과 인간 생활을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마을의 입지를 따지면서 물 흐르는 방향과 형세, 들판, 산, 흙빛, 햇빛 등 자연 조건을 설명한다. 크게 보면 풍수 입지론, 경제환경 입지론, 문화환경 입지론, 자연환경 입지론을 복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8도의 지리, 역사, 인심, 특산물, 그 지역 출신 인물과 풍속, 정치 득실 등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예를 들어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남원, 구례, 성주, 진주처럼 한 결당 100말에서 140말까지 수확이 나는 곳을 기록했고, 진안의 담배, 전주의 생강, 한산의 모시 등 각 지역의 특산물도 소개했다.

『택리지』는 그 이전에 나온 『동국여지승람』 같은 책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이전의 지리서들은 국가가 발행했기 때문에 관찬지리서라고 부르지만, 『택리지』는 최초로 민간에서 만든 지리서인 셈이다. 더구나 관찬지리서가 왕권 유지나 강화를 위해 세금을 거두고 지역을 관리하기 위한 행정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택리지』는 말 그대로 사람 살만한 곳을 찾기 위한 기록이었다.

사농공상 4민은 본래 평등하다

『택리지』에는 8도의 지리 등을 논한 「8도총론(八道總論)」 앞에 「4민총론(四民總論)」이 나온다. 이중환은 이 글에서 옛날에는 사대부라는 것이 없고 모두 백성이었으며 백성 가운데 사농공상의 네 종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비(士)가 어질고 덕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맡겨서 대부가 되는 것이고 벼슬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역량에 맞추어 농사꾼도 되고 장사꾼도 되며 공쟁이도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중환은 그러한 예로 유교에서 높이는 순임금이 농사도 지었고, 도자기도 구웠으며, 물고기를 잡아 팔기도 한 사실을 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이중환은 사대부 가운데 농사꾼, 장사꾼, 공쟁이를 업신여기는 사람이나 반대로 농사꾼, 장사꾼, 공쟁이면서 사대부를 선망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모두 근본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처럼 이중환은 사람이 타고나면서부터 신분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벼슬 여부에 따라 신분이 나누어진다고 봄으로써 사농공상 4민을 직업상의 차이 정도로 이해했을 뿐 지배층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중환은 살만한 곳을 찾았을까? 이중환이 가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당파를 만들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당쟁을 벌리면서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이중환은 당파싸움이 없어지면 사대부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질 것이고, 사농공상 4민의 구별이 없어질 것이며, 사대부들이 살만한 곳이 없어질 때 비로소 사람 사는 모든 곳이 살만한 장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중환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얻은 결론은 전국 어디에도 살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택리지』의 결론 부분에 살만한 곳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어쩌면 이중환이 생각한 그런 마을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중환은 『택리지』 안에 묘한 말을 남겼다. ‘살아있는 눈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글자 밖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스스로 수양을 잘하면 자신이 사는 곳의 인심이 좋은지 나쁜지는 따질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이런 우화가 있다. 어떤 마을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 그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산 노인을 찾아가 물었다. “이 마을 사람들 인심이 어떤지요?” 그러자 노인이 되물었다. “당신이 전에 살던 곳은 어땠나요?” 이사 온 사람이 답하였다. “아주 좋았지요. 어려운 일은 서로 돕고, 기쁜 일은 함께 기뻐하고 그랬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답하였다. “여기도 그럴 거요.” 얼마 뒤 또 다른 사람이 새로 이사 와서 노인을 찾아가 물었다. “노인장, 이 동네 인심이 어떤가요?” 그러자 역시 노인이 되물었다. “당신이 전에 살던 곳은 어땠나요?” 이사 온 사람이 답하였다. “말도 마십시오. 서로 헐뜯고 시기하고 정말 못살 곳이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답하였다. “여기도 그럴 거요” 이중환이 전국을 다니면서 얻은 결론은 살만한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실천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본 것은 아니었을까?

『택리지』는 조선시대 내내 금지된 책이었으며 따라서 한 번도 인쇄되어 간행된 적이 없었다. 당쟁으로 몰락한 사대부들끼리 서로 빌려주고 받으면서 한자 한자 베껴 놓고 감추어가며 몰래 읽는 책이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조선 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에서는 세 번이나 번역 출간되었고 임오군란 무렵 군대 파견을 준비하던 청나라에서도 한 차례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은 그만큼 조선을 잘 알려주는 책이었던 셈이다. 이 책에 대해 우리와 남이 보여준 태도가 식민 지배를 하는 쪽과 당하는 쪽의 갈림길이 아니었을까?


저자 김교빈 자세히보기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안개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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