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2일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영면에 들었습니다. 유작이 된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불과 5개월 전에 출판됐고, 선생은 담낭암 투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면서도 문학작품 심사를 위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꼼꼼히 읽었다고 합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이었던 박완서 작가.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국가학술연구 DB(http://www.riss.kr)의 도움을 받아 박완서 작가와 그가 남긴 작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보통 여자’ 박완서에서 문인 박완서로박완서 작가는 1931년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은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그는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1950년에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합니다. 개강은 그 해 6월이었고, 같은 달 25일 전쟁이 일어납니다. 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완서에게 전쟁은 ‘전쟁’이라는 두 글자로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6·25가 없었어도 내가 글을 썼을까, 6·25가 안 났더라면 선생님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 것처럼 전쟁은 그에게 평생에 걸쳐 애도하고 치유해도 극복하기 힘든 엄청난 상처였습니다. 그 전쟁이 휴전되던 1953년, 그는 호영진 씨와 결혼해 주부가 되었습니다. 이후 5남매를 낳아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다 1970년 당시 마흔이란 나이로 상금 50만원이 걸린 ‘여성동아’ 현상공모에 장편소설 『나목』을 보내 소설가가 됩니다.
![]() |
박완서 소설의 시작이자 작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인 고백 소설「나목」 |
>> 박완서와 6.25 혹은 한국 전쟁 :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
지금은 아파트와 고층빌딩이 빼곡이 들어선 서울이지만 60여년 전에는 폐허였습니다. 박완서 선생의 작품에는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 |
바퀴가 불안전하게 탈탈거리는 손수레에 피난 보따리와 올망졸망한 어린 동생들을 태우고, 두 살 터울인 남동생과 번갈아 밀며 끌며 돌아다보고 또 돌아다본 폐허의 서울 - 그땐 하늘이 낮고 부드럽게 흐려 있었고, 눈이 조금씩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했었고, 페허 사이에 도괴를 면하고 제법 의젓하게 서 있는 건물들도 창문이란 창문은 화염을 토해낸 시커먼 그을음 자국으로 아궁이처럼 음험하게 뚫려 있었고, 북으로부터의 포성이 바로 무악재 너머에서 나는 듯 가까웠고, 사람들은 이고 지고 총총히 총총히 이 고장을 등지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中 |
전쟁은 눈에 보이는 것만 폐허로 만든 게 아닙니다. 전쟁 중 의용군으로 끌려간 박완서 선생의 오빠는 총상이라는 커다란 상처를 입고 가족에게 돌아옵니다. 돌아온 지 8개월, 그의 오빠는 세상을 떠납니다. 또 선생은 전쟁 중에 삼촌의 죽음도 겪습니다. 가족의 죽음,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에게 당한 수모’, 가난 등으로 요약되는 전쟁의 고통을 그는 “언젠가는 글로 쓰리라”는 증언 욕구로 견뎠습니다.
『나목』과 『엄마의 말뚝』『목마른 계절』『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아저씨의 훈장』『겨울 나들이』『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등은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증언한 작품들입니다.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아픔과 슬픔은 극복 할 수 없는 것이며, 아픔과 슬픔은 이길 수 있는 게 아니고, 참고 견디며 사는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고통을 극복할 수는 없지만 선생은 글쓰기를 통해 고통을 덜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요, “내게 글을 쓴다는 건 내 고통의 일부를 독자에게 나누는 거예요. 내 고통을 글로 옮기면서 내가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죠.” 선생의 고통이 승화돼 태어난 수많은 작품들은 그가 떠난 다음에도 독자들을 아프게 하고, 선생처럼 자유롭게 도와주고, 가볍게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 너무나 익숙한 일상 이면의 ‘진실’
집이나 회사 같은 건물, 군인과 민간인, 한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철저히 파괴한 전쟁에도 쉼표가 찍혔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우리나라는 부지런히 전쟁의 흔적을 지웠습니다. “어떡허든 우리도 한밑천 잡아 한번 잘살아봅시다.”는 생각으로 일궈낸 경제성장을 밖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100여년 걸린 산업화와 근대화가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기적의 뒷면에는 열악한 노동환경, 빈부격차, 농촌공동화 등의 사회적 문제가 켜켜이 쌓였습니다. 박완서 작가는 이런 풍경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그 속에 녹아 있는 강박증과 허위성, 허영심 등을 꼬집는 글을 썼습니다.
![]() |
참 생각난다. 인형옷 만드는 집 아줌마가 텔레비전 연속극 얘길 하면서, 재벌의 아들이 인생 공부 삼아 물장산가 뭔가 하는 얘기를 하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리 연속극이라지만 구역질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가난을 뭘로 알고 즈네들이 희롱을 하려고 해. 부자들이 제 돈 갖고 무슨 짓으르 하든 아랑곳할 바 아니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 가난한 계집을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가난 그 자체를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召命)이다. 「도둑맞은 가난」中 |
『도시의 흉년』『휘청거리는 오후』『내가 놓친 화합(和合)』『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등의 작품을 통해 속물성과 위선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전쟁이 남긴 폐허를 아파트와 고속도로로 대변되는 경제성장으로 만회하는 동안 우리는 전쟁의 상처 위에 산업화와 근대화의 부작용을 더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 페미니스트, 박완서
박완서 작가는 누구나 알듯이 ‘여성’입니다. 소설가 이전에도, 소설가로 살 때도 선생은 여성이었습니다. 선생이 데뷔할 때인 1970년대에는 불혹의 나이에 데뷔한 여성 소설가가 보기 드문 사례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시선은 ‘작가’ 박완서 보다 ‘주부’ 박완서에 쏠려 있었는데, 이때 박완서 선생은 여성작가로서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은 지방대 교수인 남편의 위선적인 일탈에 결국 이혼을 택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 대해 박완서 선생은 “여성문제를 인식하고 쓴 작품”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또 이후 『서 있는 여자』는 대학교수의 아내와 딸이 가부장적 가장 밑에서 반항과 안주를 선택하게 되는 과정을,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는 싱글 여성이 상대 남성의 이기적인 태도로 미혼모의 처지가 되고 아이까지 빼앗길 위기에서 이를 꿋꿋이 헤져나가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이밖에도 『지렁이 울음소리』『그 가을의 사흘동안』『꿈꾸는 인큐베이터』등 남성의 시선, 남성의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던 문학계에 선생은 ‘여성’이라는 새로운 프리즘으로 탄생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였습니다.
![]() |
“페미니즘 문학은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좋은 문학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요. 내 생각에 진짜로 좋은 문학이라면 그 자체로서 페미니즘 문학일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돼요” 박완서 |
◀ 박완서 출처 : 예술로 ☞ 바로가기 |
박완서 선생은 여성의 삶을 문학 속으로 끌어들었고, 한국 페미니즘 문학을 이끄신 분이라는 게 문학계를 비롯한 각계의 일치된 평가입니다.
>> 한국문학의 거목 박완서
■ 박완서 문학의 말맛 느껴보기!
‘우두망찰’, ‘츱츱하다’, “너무 엄마를 바친다” 박완서 선생 작품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조근 조근 말하는 것 같은데요, 이 주인공들이 쓰는 말이 가끔 무슨 의미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선생은 이를 두고 “표준어를 쓰는 것 같아도 개성 지방 말을 많이 썼다”고 밝혔습니다. 덕분에 우리말의 결이 한층 더 풍부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박완서 작가의 소설에 쓴 어휘들을 모아 놓은 책이 있습니다.
![]() |
그의 소설은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현실을 그려낼 뿐 아니라, 치밀한 심리묘사와 능청스러운 익살, 삶에 대한 애착, 핏줄에 대한 애정과 일상에 대한 안정된 감각을 보여준다. 현실에 기반을 둔 그의 소설은 대체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문체를 지니고 있다. 근·현대사의 경험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퐁속작가로서의 그의 면모는 당대의 세태를 충실히 반영하면서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생동감을 부여한다. … 그런데 작품을 읽다가 문체상의 특징과 어휘의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관계로 일본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생경한 한자어와 작가 개임의 체험에 바탕을 둔 개인적 어휘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언어적 특이점과 관련된 문제로 독자들이 자칫 박완서 문학의 참 맛을 놓쳐버릴까 저어하여 이번 소설어 사전을 기획하게 되었다. 『박완서 소설어 사전』머릿말 中 |
그의 작품을 좀 더 깊게 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입니다.
■『우리 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박완서, 권명아, 웅진닷컴 (2002)
이 책은 박완서 선생과 딸 호원숙 씨, 그리고 동료작가 김영현 씨가 쓴 글이 묶여있습니다. 제1부는 박완서의 삶이란 주제로 박완서 선생이 쓴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와 호원숙 씨가 쓴 ‘모녀의 시간’, 김영현 씨가 쓴 글이 실려 있습니다. 제2부에는 자선대표작과 평론, 제3부에는 연구 자료로 이뤄져 있습니다.
세 가지(본인, 딸, 동료) 시선을 통해 보는 소설가 박완서는 어떤 모습일까요? 책장을 덮고 나면 박완서 선생의 초상화와 선생이 있는 풍경화를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죽은 사람을 잘 보내고, 돌아가야 하는 삶
“모든 죽음은 개인적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한다.” 비나 다스라는 사람이 한 말인데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물론이고 내가 몰랐던 이의 죽음도 충격과 공포, 죄책감 그리고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승으로 떠난 사람을 산 사람이 제대로 떠나보내는 일은 어떤 언어로도 설명되지 않는 무척 힘겨운 심리적 과업입니다. 선생은 특히 오빠와 삼촌, 남편과 외아들의 죽음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암으로 남편을 잃은 지 세 달 만에 의과대에 다니던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낸 선생은 부산 수녀원에 칩거해 이해인 수녀와 교우하며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다고 합니다.
![]() |
그때까지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이 하나도 안 중요해지고 하나도 안 중요하게 여겨온 것이 중요해진 거예요. 이를테면 전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했는데 이젠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해요. 남을 위해서 나를 속이기가 싫어요. 무엇보다도 피곤하니까요. 가장 쓰잘데 없는 걸로 진 빼기 싫어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中 |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체로 쓰인 단편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의 한 대목입니다. 아들을 잃고 난 뒤 일어난 변화 중의 하나를 담담히 얘기하는 부분에서 박완서 선생의 슬픔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간 이들로 가슴 아파하던 박완서 선생은 이제 먼저 간 이들을 따라 갔습니다. 남아있는 우리들은 그의 작품을 통해 글쓰기의 치유력을 빌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인이 되신 박완서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 참고사이트·문헌
예스24 작가파일 (http://www.yes24.com/2.0/AuthorFile/AuthorFileD.aspx?authno=89&Scode=008)
여성신문 ‘박완서와 페미니즘’ (http://www.womennews.co.kr/news/48347)
웅진 문학 블로그 (http://wjbooktown.blog.me/140122641600)
네이버 책 (http://book.naver.com)
<그녀에게 말하다> 김혜리가 만난 사람 / 김혜리 / 씨네21(2008)
>국가지식포털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전통건축색채를 통해서 보는 어울림의 가치와 의미 (0) | 2011.05.31 |
---|---|
[스크랩] 왕벚나무에 관한 이야기 (0) | 2011.05.23 |
[스크랩] 성북동 이종석 별장 (0) | 2011.01.10 |
[스크랩] 민화, 민중의 삶이 담긴 그림 (0) | 2010.12.29 |
[스크랩] 역사도시 서울의 근대기 변화 (0) | 2010.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