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질서와 인간 존중의 가치를 담고 있는 색채의 세계
서양에서 20세기 데 스틸 운동의 영향을 받아 건축된 대표적인 주택으로 리트벨트의 슈뢰더 주택을 떠올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데 스틸 운동의 주요 특징으로 원색의 사용을 꼽을 수 있다. 데 스틸 운동에서 원색이 사용된 이유는 사물의 순수성이나 본질을 표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슈뢰더 주택은 기하학적 추상주의를 표방한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아 이차원적 회화를 삼차원적 건물의 입면에 적용시킨 예로도 유명하다.
또 건물의 입면을 중시해서 세운 건축물로 르 꼬르뷔제의 사보아 주택과 알도 로시의 집합주택을 생각할 수 있다. 사보아 주택의 외관도 슈뢰더 주택처럼 흰색이나 검정, 녹색 등의 원색으로 되어 있다. 이들 주택이 20세기 대표적인 건물로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회자되는 명품 건축이긴 하지만 환경색채의 측면에서 볼 때 건축을 바라보는 동서양의 다른 시각을 볼 수 있다.
이 주택들은 주변 환경과는 확연이 구별되는 랜드마크 건물로 이웃 주택과는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저 자연을 무대로 해서 전면에 부각된 건물인 것이다. 이처럼 건축을 자연과 구분하여 바라보는 서양의 시각은, 자연과 일체화된 건물이 아니라 자연과는 대립, 내지는 대비되는 건물을 생산한다.
이에 비해서 동양의 건축, 특히 한국의 전통 건축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일체화된 건물이다. 건물과 자연 중에서 어떤 것이 무대이고 어떤 것이 주인공이라고 딱히 구분 짓기가 어렵다. 건물을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건축관은 주변 자연 환경과의 조화를 중시한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의 전통 서민 주택이 자연과 조화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환경색채, 어울림의 가치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자연을 떠나서 인간은 한시도 존재할 수 없다. 자연을 느끼고, 자연과 교감하는 삶은 우리들에게 정신적, 심리적 안식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삶의 에너지를 제공한다. 법정은 말한다. “현대 문명의 해독제는 자연밖에 없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기댈 데가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 존재와 격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크게 보면 우주 자체가 커다란 생명체이며, 자연은 생명체의 본질이다.” 라고. 이러한 법정의 생각처럼 주택 내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받으려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전통 가옥의 색채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가옥이 동질성과 정체성을 보여 주었다고 해서 항상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룬 것만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또는 부와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돋보여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왕이 사는 궁궐이나 절에 단청을 사용했다. 다른 한편, 단청은 인간의 지배욕의 발현이기도 했지만 건축물을 외부자극에서 건강하게 지켜주는 쓰임이기도 했다. 단청은 화려한 색채 예술이다.
자연과 대비되는 화려한 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단청은 위엄을 나타내는 건물을 위한 배려였다. 단청에 나타난 색을 보면, 그 속에 청, 적, 황, 백, 흑의 오방색과 벽색, 녹색, 홍색, 자색, 황색의 오간색을 찾아낼 수 있다. 어떤 색채학자가 이야기했듯 하나의 색상을 보고 그 색이 좋다, 나쁘다 이야기할 수 없다.
이 말처럼 색의 특성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인간의 존재감이 다른 사람으로 인해 확인되는 것처럼 색도 인접 색에 의해서 그 존재감이 결정된다. 개체를 중시하는 서양에 비해 우리의 전통 건축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을 중시한다. 이처럼 관계성을 중시했던 조상의 생각은 하나의 색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을 동시에 보는 접근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백색 하나만을 생각하지 않고 백과 흑을 생각했으며 자색과 황색을 동시에 놓고 색채를 결정했다. 이러한 관계성을 고려하여 오방색을 만든 다음, 여기에 색의 관계를 생각하여 색채의 조합을 만들어 냈다. 붉은색과 파랑색을 지칭하는 단청의 용어에서조차 우리들은 색채의 관계를 중시한 조상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색과 색의 관계성을 중시한다고 해서 단일 색상의 상징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전통색채에서 백색은 태양과 신성함, 길한 조짐을 상징하며 서쪽을 뜻한다. 흑색은 신격, 물, 북쪽을 상징한다. 적색은 붉은 색으로 밝고 고귀함과 함께 남쪽을 뜻하며, 황색은 황제와 권위를 상징하는 색으로 우리나라 왕도 사용이 금지되었던 색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대한제국기에 황색 사용을 선포한 우리나라는, 이 시기에 그 사용이 급증하였다.
복식과 궁궐 단청을 비롯하여 궁중 생활 전반에 황색 사용이 증가하였다). 청색은 나무, 하늘, 물, 탄생, 젊음, 낮은 지위를 상징하며 방위로는 동쪽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색을 만물의 질서와 조화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 수단으로 생각하며 적극적인 색채 사용을 모색했던 것이다.
색채는 상징 세계를 표상하는 요소이며 문화의 산물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이러한 생각이 밑바탕이 되어 창안된 단청은 우리의 문화 정체성과 자부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음양오행의 이론을 대입시켜 색과 색의 관계성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단청의 배색과 형태는 우리의 전통 건축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보듯, 단청은 우리 전통 문화의 정체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건축 요소로서 앞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할 충분한 가치와 잠재력을 갖는다.
인간은 타임머신을 타지 않는 한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현재도 한순간에 과거가 되고, 오직 우리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과거로의 회귀는 인간의 동경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느낀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느낌을 안겨주는 환경 색채는 사람들을 사색하게 하고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색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시의 환경색채를 계획할 때 역사적 느낌의 시간성을 반영한 색채를 사용한 것을 볼 필요가 있다. 환경색채를 함에 있어 현대화된 전통색채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풍상이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물은 왠지 모르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는 아마도 삶의 흔적을 그 곳에서 발견할 수 있고, 오랜 세월의 켜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통색채의 현대적 발현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서양의 근대건축이 순수함과 같은 특성을 강조하고, 상징성에 집착하다보니 인간의 본성과는 괴리가 있는, 다시 말해 인간이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인공적인 색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서양의 근대 건축물에서 대체로 사람들은 편안함과, 인간 친화적 느낌을 받지 못한다.
산업화로 대표되는 기계주의는 인간의 심리적 측면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않으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휴머니즘이 미흡하다. 유토피아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여 우리가 받아들였던 서양근대건축을 탈피하여 이제 우리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할 시점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21세기는 감성을 중시하는 드림 소사이어티를 꿈꾼다. 이성의 형태와 상반되는 색채는 감성적인 측면을 많이 갖고 있다. 색채에 대한 적절한 사용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고 부드럽게 만들며,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색채를 환경적으로 적절하게 사용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전통 건축에 응축되어 있다. 그동안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색채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였다.
별도의 비용을 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보다 좋은 환경, 생동감 넘치는 삶의 장소를 만들 수 있다. 전통색채를 현대의 건물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많은 무리가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색채 속에 담겨있는 색채조화의 기본 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통 색채의 현대화를 이룬다면, 문화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의 가속화에 따라 획일화되고 있는 현대 도시를 소생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전통색채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글ㅣ사진 ㆍ이현수 연세대학교 주거환경학과 교수
사진 ㆍ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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