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게시판에 올려도 되는 글인지 몰라서 이곳에 올리니 관리자분께서 판단하셔서 다른 곳으로 옮기던지 또는 삭제하셔도 좋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祖,宗칭호에 대하여
조선왕조에서 宗이라는 묘호가 祖로 변한 왕은 선조, 영조, 정조, 순조이다. 이렇게 宗에서 祖로 묘호가 변화되었는가에 대하여 장영훈은 <왕릉이야말로 조선의 산 역사다/도서출판 담디>라는 책에서 <치세업적이 있는 왕을 조祖라고 하고 덕망이 있는 왕은 종宗이라 한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는 오늘날 교과서 교육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교육을 바로 잡아야 한다. 적자혈통왕은 종이며, 서자혈통왕은 조라고 하는 것이 정답이다. 이에 대한 유력한 증거가 왕릉 망주석에 붙어있는 세호들 이었던 것이다.>(상기책 252쪽)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 우선 조선왕조 가계에서 적자혈통과 서자혈통의 왕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후(계비를 포함)에게 적자혈통으로 등극한 왕은 다음과 같다.
2대 정종(태조의 둘째), 3대 태종(태조의 다섯째), 4대 세종(태종의 셋째), 5대 문종(세종의 장남), 6대 단종(문종의 장남), 7대 세조(세종의 둘째), 8대 예종(세조의 둘째), 9대 성종(태조 장남 월산대군의 장남), 11대 중종(성종의 장남), 12대 인종(중종의 첫째/계비 장경왕후 소산), 13대 명종(둘째/계비 문정왕후 소산), 17대 효종(16대 인조의 둘째), 18대(효종의 첫째), 19대 숙종(현종의 첫째), 20대 경종(숙종의 첫째/희빈장씨의 아들/희빈장씨는 왕후로 책봉된 후 폐서인되고 사사賜死됨), 24대 헌종(23대 순조 장남인 효명세자의 첫째), 27대 순종(26대 고종의 첫째)
여기서 연산군과 광해군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산군은 정비正妃 소생이지만 왕비가 폐비되었고 중종반정으로 광해군도 폐위되었다. 광해군은 후궁의 소생으로서 세자시절부터 세자의 위치가 불안하였고 왕이 된 후도 소수파인 북인의 지지를 받고 있어 매우 취약한 정권이었다. 결국 반정反正에 의하여 왕에서 폐위되었다.
기타 서자 출신 왕으로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가 있다. 고종이나 순종은 마지막 왕이기 때문에 장영훈의 말대로 왕통을 조정할 시간이 없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정비正妃에게서 낳은 왕이 宗이란 묘호가 붙었고 기타 광해군이나 연산군을 제외하고 서자출신 왕이 祖라는 묘호를 사용하였다는 장영훈의 말한 것처럼 서자혈통을 바로 잡기 위해 종이 조로 변화되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문제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祖와 宗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철종 8년(1857) 8월 9일 순조의 공렬을 찬양하여 ‘祖’로 일컬을 것을 청하는 지돈녕 이학수의 상소에서 이러한 祖와 宗간의 관계를 명확히하고 있다.
... 《대대례(大戴禮)》에 이르기를, ‘시호(諡號)란 것은 행동에 대한 실적(實蹟)이다.’라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그의 시호를 듣고서 그의 정치를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순고의 행적을 헤아려보고 순고의 정치를 상고해 보건대 조(祖)라 일컫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왕업(王業)을 창시한 임금을 조(祖)라 일컫고 계통(系統)을 이은 임금을 종(宗)이라 일컬었음은 고금(古今)의 떳떳한 법식이었습니다. 전한(前漢)·후한(後漢) 4백여 년 동안에는 오직 고조(高祖)와 세조(世祖)뿐이었고 송(宋)나라 3백여 년에도 오직 태조(太祖)뿐이었으며, 송 고종(宋高宗)의 묘호를 의정할 때에도 더욱 오래도록 곤란해 하였습니다. 명(明)나라에는 오직 태조(太祖)와 성조(成祖)뿐이었고 우리 나라에는 오직 태조 대왕·세조 대왕·선조 대왕·인조 대왕뿐이었으니, ...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즉 祖는 개국한 사람에게 붙이는 것이고 계통을 이은 사람에게는 모두 宗이라는 명칭을 붙인다는 것이 일반적이 었다는 것이다. 중국 황제의 묘호를 찾아보면 한나라의 경우 전한의 황제인 한고조와 후한을 세운 世祖만이 祖의 묘호를 붙였고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에서도 나라를 세운 태조만이 祖의 묘호를 붙이고 모든 황제가 宗으로 묘호를 붙였다. 특히 원나라는 몽골제국을 세운 징키스칸에게 태조의 묘호를 붙이고 몽골제국에서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에게는 世祖라는 묘호를 붙였다. 명나라에서는 조카에게서 황제위를 빼았은 3대 영락제가 成祖라는 묘호를 사용하였고, 청나라는 3대 순치제가 世祖라는 묘호를 사용하였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나 원나라의 쿠빌라이가 世祖의 묘호를 받은 것은 새로이 개국을 했지만 <世>라는 단어의 뜻이 <이었다>는 뜻이므로 한나라나 몽골제국을 계승했다는 개념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명나라의 경우는 조선의 世祖처럼 조카를 밀어내고 황제위를 찬탈한 영락제가 成祖라는 묘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장자계승이 아닌 방계로서 새롭게 종통을 세웠다는 개념이고, 청나라 순치제가 세조라는 명칭을 받은 것은 순치제가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을 정복함으로써 청을 이어받았지만 명실상부한 청나라를 세웠다는 것 때문에 祖를 사용한 것이라 생각한다.
한나라와 청나라의 世祖라는 명칭은 조선 7대왕 世祖와도 같기 때문에 주목되는 명칭이다. 世祖는 정변으로 선왕을 밀어내고 자신이 왕에 등극한 예로서 명나라와는 달리 한나라, 원나라, 청나라처럼 종통을 이어받았다는 개념에서 世祖라는 묘호가 주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당나라를 보면 같은 정변이지만 태종은 나라를 세운 임금을 고조라고 하고 정변으로 정권을 탈취한 태종이 실제 나라를 세운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처음 太와 정변을 일으켰지만 종통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에서 宗이라는 묘호를 주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고려 황실 계통을 보면 태조를 제외하고는 모든 황제가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전까지 모두 宗을 묘호로 사용하였다. 장영훈이 주장한 것처럼 서자가계에 祖를 붙인다는 관점에서 고려왕실 가계를 보면 고려 황제 모두가 왕비 소생이다. 고려는 조선과 달리 正妃를 하나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왕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서자庶子의 개념이 없으며 황제도 형제간에도 양위되었기 때문에 적장자의 개념이 조선과 달리 없었다.
어쨌든 祖라는 명칭은 宗보다는 존중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새롭게 종통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북송에서 남송으로 천도한 송 高宗조차 祖를 붙이지 않았던 묘호가 조선에서는 祖라는 명칭이 많이 부여되었던 것인가 하는 것이다. 祖를 쉽게 붙이지 않는다는 문제는 앞서 언급한 상소에서도 언급되었다. 조선의 경우 우선 계통을 잇는 왕에서 祖를 맨처음 붙인 왕은 세조이다. 세조는 왕위를 찬탈한 왕으로서 새롭게 종통을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중국 명나라 영락제처럼 祖를 붙인 것이다. 그러나 세조의 경우를 보면 불법적인 왕위찬탈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재위 당시 존호尊號를 올리는 상소가 있었고 그에 못이기는 척 존호를 올리고 있다. (세조 3년 1월 16일 영의정 정인지 등이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다 인터넷 왕조실록 기사 참조)존호란 임금이나 왕비王妃의 덕을 기린다 하여 올리던 칭호로서 세조의 덕을 기려 기존 존호보다 더 높은 존호를 올려 받은 것이다. 즉 자신의 치적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이런 존호를 올리는 일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세조의 묘호가 새로 왕통을 만들었다는 개념을 기반으로 世祖라는 묘호가 결정된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에 같은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그런 祖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연산군의 폐위과정을 보면 연산군의 폐위는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자신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강하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하여 새로운 왕통을 세웠다는 뜻보다는 패륜을 저지르는 왕을 제거하고 중간에 제대로 된 왕통을 정당하게 이어간다는 개념으로 가운데 中를 쓰고 宗을 사용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宗은 계속 써오다가 선조宣祖에서 변화된다. 宣祖도 원래는 宣宗이었다. 그러나 광해군 8년(1616) 8월 4일 선종대왕과 두 왕후를 추상追上하여 존호와 묘호를 바꾼다. 이때 바뀐 묘호가 선조이다. 당시 상황을 보면 신하들이 광해군 8년 5월 17일부터 광해군의 존호를 올릴 것을 계속 상소해왔다. 이런 것을 계속 물리치다가 동년 8월 2일 자신의 존호를 올리라는 신하 상소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틀 뒤인 8월 4일 자신의 아버지인 宣宗의 묘호를 宣祖으로 추상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존호를 추상하면서 겨면쩍으니 선왕인 선조의 존호와 묘호도 추상하게되는 것이다.
이런 존호를 올리는 상황은 존호를 올리는 상소에서도 보듯이 신하들은 아버지인 宣祖의 명예를 지켰기 때문에 현재 왕인 광해군의 존호를 올릴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입장에서 볼 때 자신만의 존호를 올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기 선왕인 선조의 존호와 묘호를 추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은 당시 광해군의 정치적입지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리지만 적장자가 있는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고 결국 광해군 6년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과정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은 여러 방안 중 하나가 바로 광해군 자신의 존호를 올리는 것이다. 어쨌든 자신만의 존호를 올리는 것은 명분상 문제가 있어 선왕인 선조의 존호까지 같이 올렸던 것이다.
다음으로 宗에서 祖로 묘호가 변한 것은 영조와 정조도 아닌 정조 아들인 純祖이다. 순조의 묘호 역시 純宗이었다. 그리고 英祖, 正祖 묘호 역시 당시에는 英宗, 正宗이었다. 순조의 묘호는 헌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대를 이은 철종에 의하여 순종에서 순조로 추상되었다. 이것 역시 철종의 왕계를 순조에 두고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종통을 만든 왕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정파나 왕의 콤플렉스 때문에 祖와 宗을 붙이다 보니 후대로 내려와 묘호에서 祖와 宗을 구분하는 개념이 매우 모호해진다. 순조에 대한 묘호를 추상하는 앞에 언급한 이학수 상소(철종 8년 9일) 祖는 나라를 세운 왕 宗은 왕업을 이은 왕으로 정의하면서도 이어서<조(祖)는 공로(功勞)요 종(宗)은 덕화(德化)로서 두 가지가 모두 성대하고 아름다워서 조가 반드시 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고 종이 반드시 조보다 깎이는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당면(當面)한 시기에 의하여 그 칭호를 달리했을 뿐이다.’>라고 이야기함으로서 조와 종의 구분을 과거와 달리하고 있다.
또한 다음 날인 철종 8년 8월 10일에 있은 정원용에 상소에서는<덕화(德化)가 있으면 종(宗)이라 일컫고 공로(功勞)가 있으면 조(祖)라고 일컫는 것은 곧 당연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요 공통(共通)된 분의(分義)입니다.>라고 함으로써 祖, 宗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간 엄밀하게 써오던 祖, 宗의 개념이 후대에 들어 왕의 업적을 정의하는 개념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이런 것은 결국 당파의 이해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학수 상소를 보면 순조시기 홍경래의 난을 진압했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려 한마디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로 보면 철종까지 꼭두각시 왕을 내세울 정도로 노론이 정권을 잡고 오로지 함으로써 점점 사회가 불안정해가던 시기이다. 이런 시기를 덕화의 시기로 포장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 정조나 영조의 존호나 묘호를 추상하는 작업보다는 자신 정파의 입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순조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에 대해서는 다른 문헌을 통해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철종의 가계家系에 대한 글은 아래 링크 참조
http://blog.naver.com/seongho0805/150017887108
다음으로 宗에서 祖로 묘호가 바뀐 왕은 영조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순조의 묘호를 추상할 때 같이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시 정조 및 영조의 명에 의하여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금지된 사도세자의 존호도 추상해야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껄끄러운 문제를 빗겨가기 위해 순조만을 추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도세자에 대한 존호 추상의 문제는 고종에 들어와서 이루어진다. 고종은 정조존호를 추상하고 사도세자에 대한 묘호를 장헌에서 장종으로 추상追上하게 된다.(고종36년/1899년/9월 1일)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정조의 묘호는 정종이었다. 이렇게 정조와 사도세자를 추상하는 것은 자신의 왕통을 정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 36년 12월 23일 정조의 묘호를 추상하는 내용을 보면 사도세자를 고조할아버지로, 정조를 증조할아버지로, 순조를 할아버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즉 영조에서 순조로 이어지는 것을 자신 계통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결정한 것은 고종의 가계를 살펴보면 이해가 된다. 철종과 고종은 가계로 보면 같은 어머니에서 낳은 자식들이기 때문에 정조와 같은 가계라 할 수 없다.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전계대원군-철종으로 이어지는 계통이고, 고종은 정조의 같은 이복동생인 은신군-남연군-흥선대원군-고종으로이어지는 계통이다.
은언군,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둘째부인인 숙빈임씨肅嬪林氏의 소생으로 같은 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연군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 6대손 병원秉源의 아들로서 은신군에게 양자로 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혈연관계로 본다면 철종과는 전혀 다른 가계이므로 영조, 정조, 순조를 고종의 가계로 결정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신이 결정한 왕계에 대한 대한 추존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사도세자을 장조로 추존한 후 고종 27년1월 5일에 영종을 영조로 추존하였고 그 후 고종이 황제로 올라간 지 3년째되는 동왕 36년 12월 23일 사도세자인 장종을 장조로 정종을 정조로 이미 순조로 되어 있는 순조의 존호를 올렸다.
묘호가 宗에서 祖로 바뀐 과정을 실록을 통해 살펴본 결과 묘호의 제정 원칙이 무너지면서 宗에서 祖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바뀌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권에 대한 콤플렉스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선조의 묘호가 선종에서 바뀌는 과정은 분명 적장자를 두고 왕에 오른 정통성 문제와 취약한 당파 기반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후 순종이 순조로 변화된 과정을 보면 그것을 당파의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에서 祖, 宗의 개념이 변질되었고 그 후로 고종에서는 자신 왕계의 정통성을 확고히하려는 목적으로 영종, 장종, 정종의 묘호를 영조, 장조, 정조로 추상한 것이다.
祖,宗의 혼동은 결국 왕권의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나온 것이므로 장영훈의 기본 개념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장영훈이 말한 것처럼 <신왕의 등극 때 선왕의 묘호가 조일 경우는 용상즉위 초장부터 적서 왕통에 대한 시시비비가 벌어질 수 있다. ... 그래서 신왕등극 시에는 선왕의 묘호를 일단 종이라 붙였다. 그러다가 적서시비가 왕권통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적어도 3대 이후에 조로 고쳐서 중조를 바로 잡았던 것이다. (상기책 251-252쪽)>라는 것은 틀린 것이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의 묘호를 선종에서 선조로 바꿨으며, 철종은 할아버지 뻘되는 순조의 묘호를 바꿨다. 그리고 순서로 따지면 순조보다는 영조, 사도세자인 장조 또는 정조의 묘호가 먼저 바꿨어야 함에도 순조의 묘호가 먼저 변경된 것은 당파의 이해득실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宗에서 祖로 묘호가 변경된 것은 순전히 정치적 결정이었지 장영훈의 말처럼 가계를 바로 잡으려 하였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왕릉이야말로 조선의 산 역사다./장영훈/도서출판 담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6권(연표,편람)/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터넷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위키백과사전 한나라/당나라/송나라/명나라/청나라 편
추 기:
인조의 묘호는 효종 즉위년 5월 15일 烈祖로 정해졌으나 5월 23일 다시 仁祖로 변경되었다. 烈祖라는 묘호에 대하여 이견이 있어 재론 끝에 변경된 것이다. 어쨌든 祖라는 기본 묘호는 그대로 두고 공적功績에 따라 붙이는 앞부분 묘호에 대한 것이 烈에서 仁으로 변경된 것이다.
원문은 아래 주소 입니다.
http://blog.naver.com/seongho0805/150096836681
'공부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옥, 이상과 지혜가 결합한 친자연적 가옥 (0) | 2012.01.30 |
---|---|
[스크랩] 한글 창제와 세종 그리고 집현전 (0) | 2011.12.25 |
[스크랩] 조선의 과학수사,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0) | 2011.05.25 |
[스크랩] 한국의 러브스토리를 찾아서 (0) | 2011.05.04 |
[스크랩] 충무공탄신일인 오늘 민족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에 대해서 (0) | 2011.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