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와 세종, 그리고 집현전
탄탄한 스토리와 빠른 전개로 많은 청자들을 사로잡았던 사극 <뿌리 깊은 나무>가 종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0월부터 방영되기 시작한 이 드라마는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은 한글 창제의 배경과 과정, 반대 세력의 이유와 배경 등을 유추·창작하여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종대왕의 모습을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습니다. 드라마가 인기를 모으면서 세종대왕과 한글창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고, 이러한 열기는 '과연 누가 한글을 창제했느냐'라는 문제를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습니다.
▶ 광화문 내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사실 창제자가 누구이냐에 관한 문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이유는 창제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으로, 학자들은 실록 이외의 자료를 통해 당시 정황을 추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세종이 직접 창제했다는 의견으로, 이는 《세종실록》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세종 25년인 1443년 12월의 기사를 살펴보면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옛날의 전서를 모방하고..."라는 내용이 있는데, 다른 업적에 관하여는 ‘친제(親制)’라는 말이 없는데 유독 글자 창제에 관해서만 확실하게 적어 놓았다는 것은 왕이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 이 의견의 골자입니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사람이 글자 창제와 같은 엄청난 일을 기획하고 심지어 그것을 직접 만들기까지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지요. 이들은 세종이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집현전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한글 창제의 주역은 다름 아닌 집현전 학사라고 주장합니다. 즉, 세종이 ‘글자를 만들라'는 명을 내렸고, 집현전 학사들이 왕명을 받들어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오랜 세월 동안 세종이냐 집현전 학사들이냐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는 사이, 세종의 주도하에 집현전 학사들이 참여해 주어진 과업을 수행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는 세종의 역할을 축소시키지 않으면서도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에 기여했으리라는 추측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현재까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현전은 무엇을 하는 곳이었고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까요? 그리고 한글 창제 과정에서 누가 무슨 역할을 담당했던 것일까요? 한글에 대한 자부심과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요즘,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http://yoksa.aks.ac.kr)'와 '한국역사정보 통합 DB (http://www.koreanhistory.or.kr)'의 도움을 받아 한글 창제와 관련된 여러 궁금증들을 해소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아름다운 한글 글자체 600년 전시회 출처: 대한뉴스 / 국가기록영상 DB ☞ 바로가기 |
>> 한글 창제의 배경과 목적
조선의 건국이념은 ‘성리학'입니다. 이는 유학(儒學)의 한 형태로서,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것입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공동체의 윤리 규범을 제시한 성리학은 주로 개인의 수양과 사회적 인간관계라는 두 측면에서 그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특히 ‘교화'에 중점을 둔 성리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세종이 통치 기간 내내 훈민 정책을 기조로 삼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교화시킴으로써 풍속이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국가와 일치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군신·부자·부부의 관계에서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은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도록 하면서,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려 넣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자세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해도 글을 모르는 이상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책을 반포한 뒤에도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세종은 새로운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배우고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글자를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가 있어야만 했던 것이지요.
또한, 당시 조선은 개국한지 40-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왕권을 확립하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그리하여 세종은 쉬운 글자를 만들어 개국의 정당성과 왕조의 정통성을 널리 알리고자 했는데, 이러한 의도는 한글을 통해 처음으로 만든 것이 조선 왕조의 창업을 기린 《용비어천가》였다는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용비어천가> 본문 일부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한편 세종은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통치하려 했지만, 조선이 정치적·문화적으로 중국과는 다른 자주적인 국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말과 소리는 중국과 다르다'라는 훈민정음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중국과 조선의 음운 체계가 달라 한자만으로는 조선의 현실음에 맞게 온전히 기록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세계무대에서 보다 당당하고 자주적인 국가 경영을 꿈꾸었던 세종에게 있어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글자를 만들고자 했던 하나의 동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세종 시대의 집현전
집현전은 1420년(세종2년) 궁궐 안에 설치된 학문연구기관으로, 왕에게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經筵),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書筵), 도서의 수집보관 및 이용, 학문 활동, 각종 사서 편찬과 주해 사업, 국왕의 자문에 대비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집현전 제도는 본래 중국에서 연원한 것으로 한나라 이래로 존재해 왔으나 그 제도가 정비된 것은 당나라 현종 때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집현전은 학사를 두어 왕과 세자에게 강의를 했고, 장서(藏書: 책의 보관), 사서(寫書 : 책이나 문서를 베끼는 일), 지제고(知制誥 : 왕의 교서 등을 지음) 등의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으나 ‘집현전'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인종 때입니다. 그러나 충렬왕 이후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했다가 조선 건국 이후 인재 양성과 학문의 진흥을 위한 목적으로 궁궐 안에 설치되었습니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집현전에 배치하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습니다. 국가에서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집현전 학사들이 볼 수 있도록 했고, 연구를 돕기 위해 많은 서적을 구입하여 집현전에 보관했으며, 능력 있는 학사에게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내려주기도 했습니다. 사가독서란 집현전 업무에서 벗어나 오로지 독서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종의 특별휴가로서, 이는 학문에만 전념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세종은 일단 집현전에 들어오면 다른 부서로 옮기지 않고 계속 학문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했고, 그 결과 우수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찬란한 문화와 유교 정치의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설치 당시 10명이었던 집현전 학사의 수는 1422년에는 15명, 1426년에는 16명, 1435년에는 32명까지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1436년에는 다시 20명으로 축소되어 고정되었지요. 이들은 유교정치의 기본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정비하기 위해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했고, 유교 윤리서를 비롯한 각종 서적의 편찬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러한 사업은 집현전 학자들의 학문이 향상되고 일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진 세종 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많은 학자들은 세종이 새로운 글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 바로 이즈음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세종의 주도하에 시작된 새로운 글자 만들기에는 집현전을 통해 길러낸 젊은 학사들이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면서 한글 창제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고,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 진행된 사업, 즉 《훈민정음해례》와 《동국정운》 등을 편찬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 집현전의 모습 출처: 행정정보DB ☞ 바로가기 |
>>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학사들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한글 창제 사업에 관여했던 집현전 학사들로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성삼문, 이개, 이선로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세종의 통치가 안정적인 단계로 접어든 이후에 선발된 관리로, ‘임금이 친히 뽑은 유명한 선비'라는 뜻의 ‘친간명유(親揀名儒)'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와 관련하여 의견을 나누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들이 세종의 정치 이념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등용된 인재들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세종을 가까이서 보필하며 그와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았으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1443년 12월에 훈민정음 창제를 완성한 세종은 그로부터 2달 뒤인 1444년 2월에 최항, 신숙주,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라 명하고 세자와 수양대군, 그리고 안평대군에게 이 일을 감독하고 관리하게 했습니다. 이는 한글과 관련된 최초의 공식적인 지시로서, 집현전 학사들이 이미 한글의 원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46년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訓民正音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은 새롭게 만들어진 글자의 이름이자 책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은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해설서로, 크게 ‘예의(例義)’와 ‘해례(解例)’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새 문자를 만든 목적과 취지, 훈민정음의 음가 및 운용법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집필한 반면, 훈민정음을 한문으로 설명한 ‘해례'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까지 총 8명의 집현전 학사들이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447년에는 한자음을 기록한 운서인 《동국정운》이 편찬되었는데, 이 작업에 참여했던 학사들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현로, 조변안, 김증 등 총 9명 이었습니다. 《훈민정음》편찬에 참여했던 학사 중에서 무려 여섯 명이 《동국정운》 편찬에 참여했다는 것은 두 사업의 성격이 비슷했다는 뜻으로, 이들이 한글 창제 이후에 이루어진 사업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우리말 어휘에서 표준 한자음이 정립되었다는 것은 곧 한글 글쓰기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이 간행된 이후에 다양한 종류의 한글 서적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고, 이는 새로운 문자를 빠르게 보급하고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세종의 명으로 편찬된 <동국정운> 출처: 행정정보DB ☞ 바로가기 |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성장한 집현전은 점차 국가 정책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세종이 사망한 다음에 더욱 가속화되었고,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관계로 진출하면서 집현전은 실질적인 정치운영의 중심기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2년 3개월 만에 죽고 나이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활발해졌지요. 그러나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형식상 선양(禪讓)의 절차로 왕위에 오르자, 세종의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출신 관료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은 세조(수양대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를 치르기도 전에 발각되어 모두 처형당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르는데, 이 말은 남효온이 지은 《추강집》에 나오는 육신전(六臣傳)에서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한편, 1977년에는 박팽년과 모의할 때 군 동원의 책임을 맡았던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나와 이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종래의 사육신에 관한 기록과 김문기에 대한 기록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응부나 김문기 중 한 사람을 제외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기존의 사육신 구성은 변경하지 않는 대신 김문기를 현창(顯彰)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 사육신묘 전경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 참고문헌 및 사이트
ㅇ <한글>, 김영욱, 루덴스, 2007
ㅇ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최경봉·시정곤·박영준, 책과 함께, 2008
ㅇ 디지털 한글박물관 (http://www.hangeulmuseum.org)
ㅇ 다음 & 네이버 백과사전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주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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