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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호 유학을 돌아보다

깜보입니다 2012. 3. 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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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유학을 돌아보다 

지난해 2월 행정안전부와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는 ‘기호유학 고문헌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 시행기관으로 충남대 도서관을 선정했습니다. 국가적으로 보존 및 활용 가치가 높은 사료와 문헌 등의 지식정보자원을 디지털화해 국가 지식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국가 DB 구축 사업의 일환입니다.

기호유학은 영남유학과 함께 16세기 한국유학의 양대 학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북 북구 유교문화권과 경남의 남명학 자료에 비해 체계적인 DB구축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해준 공주대 사학과 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현대 일부 문화비평가들이 유교문화는 전근대적, 보수적, 공리공론, 비실용적, 당파성, 추상적으로 표현하며 평가절하 하는 경향이 있다”며 “만약 유교문화가 그렇게 부정적이었다면 조선의 정신사조로 500년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어 “기호유교문화를 현대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선 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우선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최근 들어 재조명되고 있는 기호유학에 대해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유교문화 종합 DB (http://www.ugyo.net)’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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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성리학

조선의 주류 학문은 성리학(性理學)입니다. 유학의 한 형태인 성리학은 송나라의 주희가 집대성한 것으로 자구 해석에 치중하던 종래 유학과 달리 우주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적인 유학입니다. 고려 말에 한국에 전래된 이후 조선시대 들어 숭유배불 정책으로 사회개혁과 국가 운영의 기본 이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유학의 한 형태인 이를 성리학이라 칭한 것은 ‘성(性)’이나 ‘이(理)’를 논하는, 일종의 철학적 이론의 학문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성리학은 주역이나 사서 등의 경서를 새로운 해석을 통해 ‘이기론(理氣論 : 本體論)’, ‘심성론(心性論)’, ‘수양론(修養論)’ 등으로 전개했습니다. 다른 명칭으로는 송대에 이뤄졌다 해서 ‘송학(宋學)’, 정호․정이 형제와 주희에 의해 체계화 됐다 해서 정주학(程朱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합니다. 새로운 유학이란 의미로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라고도 합니다. 그 주류는 이학(理學), 도학(道學)이라고 불리는 주자학과 심학(心學)이라 불리는 육왕학(陸王學)과 양명학(陽明學)의 양대 학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성리학이라 할 때는 좁은 의미로 주자학 계통만을 말하며 특히 조선 성리학은 이학 계통의 주자학이 정통으로서 주류를 이뤘다고 보기 때문에 ‘주자학’이라 부릅니다. 조선 초 성리학은 크게 2대 계열로 나뉩니다. 하나는 정몽주에서 시작된 ‘의리학파’로 인간 내면적 본성을 강조하고 만고불변의 도덕의식을 개발하는 데 주안점을 뒀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도전․권근 계열로 상황에 대응하는 창조적 변혁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관념적 의리나 도덕보다는 인간의 의지적 연마와 지식의 개발, 문화의식 고취에 중점을 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 유학사상사의 정통을 말할 때 정도전 계열보다는 정몽주 계열의 학맥을 연원으로 삼습니다. 때문에 조선성리학의 특색이라 한다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과 만고불변의 도덕의식 개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몽주에서 시작된 의리학파의 성리학은 이후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으로 이어졌으며 4대 사화 이후 산림에서 학문에 전념하는 풍조가 일어 이론적이며 사변적인 학품 조성으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 기호유학의 흐름

조선 성리학의 최고 전성기라 한다면 15~16세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이황과 이이가 조선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던 시기입니다. 이황은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 위치한 도산서원을 근거로 후진을 양성해 이황을 따르는 제자들이 주로 영남지역에 분포했는데 때문에 이황의 학맥을 영남학파라 합니다.

이이의 제자들은 대부분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호남 지방 등에 거주해서 기호학파라 했습니다. 결국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양대 산맥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호유학은 개방적 학풍을 자랑하며 성리학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또 영남유학에 비해 성리학, 예학, 실학, 의리학, 양명학, 호락론 등이 다채롭게 전개된 것이 특성입니다.

기호유학의 형성은 16세기로 이이가 성혼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을 통해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을 활발히 전개하며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그 세력이 확장됐습니다. 이이와 성혼, 송익필의 제자들은 정치적으로 서인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기호유학의 세력이 커진 것입니다.

특히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을 거쳐 송시열에 이르러서는 현재의 논산시인 연산과 현재의 대전광역시인 회덕 등의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호서학파를 형성해 정계와 학계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17세기 이후 조선 성리학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했습니다. 김장생, 김집, 송시열로 이어지며 주자학을 정통으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예학을 정립하고 발달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성리학적 이론의 실천 욕구가 가장 활발하게 드러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호학파는 주자학을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입장의 차이로 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계 학자들과 윤선거, 윤증, 조성기, 임영 등으로 형성된 소론계입니다. 이들 노론계가 정치적 학문적 주체로서 주자의 경세론과 강상윤리를 실천 지침으로 삼아 기호학의 결속과 위상을 강화하고자 했다면, 소론계는 주자와 이이의 학설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한편 18세기 초, 조선후기 성리학에서는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가 혹은 다른가’에 대해서 기호학파 사이에서 논쟁이 일었습니다. 이를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 합니다. 이 논쟁은 권상하의 문하에서 시작했는데 인간과 동물 또는 식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하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근본적으로 서로의 본성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으로 나뉘었습니다.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대표 주자는 이간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서울 지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낙학(洛學) 또는 낙론(洛論)이라 했습니다. 반면 인물성이론을 주장한 대표 주자는 한원진이며, 이 이론을 주장한 이들은 주로 충청도 지방에 살고 있어 호학(湖學) 또는 호론(湖論)이라고 칭했습니다. 때문에 이들의 논쟁을 ‘호락논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호론은 정통 주자학을 주장하는 입장이었다면 낙론은 주자의 도통론과 거리를 둔 것이 특징입니다. 또 후에는 북학파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호락논쟁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한 특징을 형성하는 것인데 현실 사회의 실용적인 논쟁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성과 물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던짐으로써 인간의 주체성과 도덕의식을 함양하는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고 있습니다.


◆ 요약! 기호유학이란?

기호(畿湖)란 경기도와 호서․해서 지방을 포괄하는 의미이며 기호학파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이이와 성혼의 문인, 학자들의 집단을 말합니다. 기호유학은 이들 기호학파, 즉 이이와 성헌, 조헌 등 경기 지역 유학자들에 의해 성립돼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충청 지역의 학자들이 중심이 돼 발전한 유학을 말합니다. 주로 충청남도 논산, 회덕 지역을 중심으로 17세이 이후에 발전한, 기호 지역의 성리학을 칭하고 있습니다.



>> 기호유학의 인물들

기호학파는 이이, 성혼, 송익필이 주류가 돼 많은 학자를 배출했습니다. 기호학파의 인물들을 알아보겠습니다.


> 이이(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19세에 성혼과 교분을 맺었습니다.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20세에 하산해 유학에 전념했습니다. 기호학파를 성립한 그의 성리사상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 철학이 아니라 시세를 알아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강조한 그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어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율곡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성학집요> 본문 중 (새창)
율곡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성학집요> 본문 중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성혼(成渾, 1535~1598)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했습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인 윤선거와 사위 윤증에게 계승됐습니다. 기호학파 중에서도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됐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군에 위치한 성혼의 신도비 (새창)
경기도 파주군에 위치한 성혼의 신도비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서출로 벼슬길에는 나가지 못했으나 서인 세력의 막후 조정자로 군림한 인물입니다. 어려서부터 문장에도 출중하고 재능이 뛰어나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그는 아버지인 송사련의 후광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과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성리학과 예학에 밝았습니다. 1560년에는 김계휘의 아들 김장생을 첫 제자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구봉 송익필의 시문집인 <구봉시집> (새창)
구봉 송익필의 시문집인 <구봉시집>
    출처: 국가문화유산 종합 DB                      ☞ 바로가기



>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예학 사상가로 송익필의 첫 번째 제자입니다. 기호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인물로 꼽히며 그의 문하에서는 약 300여 명의 학자가,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는 약 200여 명의 학자가 배출됐습니다. 특히 그들 문하생 중에서 송준길, 송시열, 유계, 이유태, 윤선거 등 충청 5현이라 불리는 특출 난 학자가 배출됐습니다. 이들 학파의 적통은 이이에 이어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예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호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인물, 김장생의 영정 (새창)
기호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인물, 김장생의 영정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바로가기



>> 육서심원(六書尋源)

국가 DB 구축사업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는 ‘기호문학 고문헌 DB'사업의 1차년도 사업 중 하나로 육서심원에 대한 원문 이미지 및 원문 텍스트 디지털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육서심원은 한말의 학자 권병훈(權丙勳, 18641940)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단순히 간행된 문자서를 정리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원리와 방법에 의해 한자 하나하나의 자형과 의미와 음운을 연구하고 분석한 책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의미작용 없이 덧붙여진 획이 있다는 췌획설(贅畫說)과 어떤 획에 숨은 뜻이 있다는 은의설(隱義說)을 취했는데 췌획설의 경우 중국의 동작빈도 인정할 만큼 뛰어난 이론입니다. 문자배열도 독창적이어서 부수에 의한 배열과 획수의 다과 및 자형의 구조에 따른 배열로 이뤄져 있습니다. 총 30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1940년 유인본으로 30부가 간행됐습니다.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대운의 후손인 권병훈이 책을 쓴 것은 1910년부터 1933년까지 23년 동안입니다. 오랜 세월 책 집필에 매달린 나머지 손이 불구가 되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그럼에도 책의 출간 여부에 대해서는 불투명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은 최규동이란 중동학교 교장에 의해서입니다. 정인보를 통해 이 책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최규동이 막대한 경비를 부담해 책 출간을 이뤄낸 것입니다. 양적인 면에서나 내용면에서 문자서의 신기원을 마련한 책으로 평가받으며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문자서의 집대성이라 불립니다.

실제로 육서심원에 수록된 대상 한자 수는 중국의 ‘강희자전(康熙字典)’(42,174자)이나 ‘집운(集韻)’(53,525자)을 뛰어넘는 7만여 자에 달합니다. 발간 당시 30부만 출간됐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원본의 보존과 더불어 체계적인 DB 구축의 필요성이 항상 제기돼 왔습니다. 이번 기호문학 고문헌 DB사업으로 육서심원의 보존이 이뤄진 셈입니다. 

육서심원 1편[六書尋源 一編] (새창)
육서심원 1편[六書尋源 一編]
    출처: 기호유학 고문헌 DB            ☞ 바로가기



※ 참고문헌 및 사이트

ㅇ 영남성리학과 기호성리학의 지역주의적 경합 구도에 대한 현대적 조명 / 김기현(성균관대, 2006)
ㅇ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
ㅇ 디지털논산문화대전 (http://nonsan.grandculture.net)
ㅇ 카인즈 (http://www.kinds.or.kr)
ㅇ 네이버 지식사전․백과사전


출처:https://www.knowledge.go.kr/jsp/theme/themeView.jsp?themeIdx=18567&dir=al&page=1&searchOption=all&searchValue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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