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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시 돌아보는 혁명 정신, 4.19혁명

깜보입니다 2012. 4. 24.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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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보는 혁명정신, 4.19 혁명 

1960년, 마산 앞바다에 주먹만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어린 학생의 시체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16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었습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장기독재와 탄압에 항거하는 민중 시위가 이곳저곳에서 봉기하고 있던 당시 이 사건은 많은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면서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폭정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은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적 결과를 당하게 한 남한만의 반쪽정부 수립 후 시민의식이 성장할 겨를 없이 급속한 민주화와 함께 독재와 형식뿐인 민주사회도 맞이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 역사 최초로 민중이 부패정권 타도에 성공했던 시민혁명이 1960년 4월19일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4월 혁명, 4.19의거라고도 불리는 4.19혁명에 대해 알아보면서 우리 민족이 자생적인 민주화를 향해 발을 내딛은 모습을 살펴보는 한편, 우리가 우리들을 위해 가져야할 책임의식과 권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민주화운동 사료 DB(http://db.kdemocracy.or.kr)의 도움을 받아 가져봅시다.



>> 4.19 혁명의 요약과 발생 배경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 (새창)대한민국 제1대~3대대통령을 계속했던 이승만 전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집권 12년간 계속된 실정과 독재로 민심을 잃었습니다. 1960년 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당한 선거로는 재집권이 힘들어 보이자 계획적인 부정선거(3.15부정선거)를 통해 집권을 이어가고자합니다. 이 과정에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남녀노소 초등학생까지 참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정부는 계엄령과 무장탄압으로 대응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유혈 사태가 거듭되었습니다. 4월19일 발생한 혁명은 마침내 이승만 전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야당인 민주당의 집권을 이룹니다.

■ 사회/경제/정치적 배경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토에서 정경유착, 부정부패 만연, 실업자 폭증 등으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어 민생이 매우 불안했습니다.

또 이승만 정권은 6.25전쟁 발발 시 미아리까지 인민군이 쳐들어올 때까지도 국민들에게는 전시선포를 하지 않은 채 남쪽으로 피난한 후 피난민들이 미쳐 건너지 못한 한강철교를 끊어버린 것, 전쟁도중 거창 양민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을 일으키는 실정을 거듭했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반공 정책을 펴면서 친일파청산에는 소홀했던 점과 농지 개혁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점 등 역시 민심을 이탈하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 정권 연장을 위한 부당한 헌법 개정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 및 국가보안법 등을 수차례 구미에 맞게 개헌하였습니다.

* 개헌 및 법 개정
대통령중심제(1948년 1대대통령 취임)--> 대통령직선제로 발췌개헌(2대대통령 재선)--> 초대대통령 연임제한폐지(:사사오입개헌, 1956년 제3대대통령 당선)--> 반대세력 탄압을 위한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 개정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6년 6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단독정부수립 계획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1948년 5·10선거 이후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최연장자로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이 제정·공포되어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도피 중이던 부산의 국회에서 재선이 어렵게 되자 1952년 헌법을 대통령직선제로 개정하려하지만 반대에 부딪힙니다. 이에 정부는 국회해산과 반민의(反民意) 국회의원 소환이 가능함을 주장하고 관제데모를 일으켜 국회의원들을 협박했습니다. 결국 국회의원들은 의사당 내에서 경찰들에 포위된 채 기립투표 방식으로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개헌안을 통과시키게 되었으며(발췌개헌)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습니다.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에 대한 연임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을 골자로 헌법 개정이 강행되었습니다. 이는 사사오입개헌이라고도 불리는데, 당초에는 표결 결과 재적 203명 가운데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표로 개헌정족수에 1표가 미달, 부결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틀 후,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사사오입이라는 기묘한 논리를 적용시켜 개헌안이 가결 되었다고 정정선포 했습니다. 그리하여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재당선되었습니다.

■ 정권 연장을 위한 탄압과 비리
1958년에는 정권에 반대하는 사회정치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해 언론을 탄압하고 대공사찰을 강화하였습니다.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국회의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넣기도 했습니다.
또 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과 조봉암이 30%를 득표하여 정권 연장에 위기를 느꼈는데, 이후 장면은 피습을 당하고 조봉암은 간첩죄로 사형 당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심이탈로 도저히 정권 재창출이 어려워 보이자 3.15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실행하였습니다.

>> 4.19혁명의 직접적 도화선

■ 2.28 대구학생민주의거
4대 정부통령 선거운동의 막바지, 선거 패배를 예감하고 이성을 잃은 자유당정부는 대구 학생들이 장면 박사의 선거연설회로 몰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습니다. 등교 명분은 토끼잡이, 학예회, 영화관람 등이었습니다. 이에 항의한 학생들이 자주적으로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 3.15 부정선거과 마산시위
정부여당의 야당에 대한 선거운동 방해사건이 계속되는 가운데 1960년 3월 15일 선거에서는 부정과 폭력이 자행되었습니다.
독재타도를 외치는 학생들 (새창)이 부정선거는 실상 대통령 자리가 아닌 부통령 자리를 놓고 벌어졌습니다. 내무장관 최인규는 전국의 시장, 군수와 경찰 간부들을 불러 부정투표 계획을 지시했습니다. 전 유권자의 40%에 해당하는 투표용지를 부재자표 입수 등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입수해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미리 투표함에 넣었습니다. 또 3인조, 5인조씩 반공개 투표를 하게하고 투표함을 바꿔치기도 한 결과 야당 득표수가 35표밖에 안되는 기형적인 결과를 얻고, 이를 다시 여당이 70%정도의 득표를 한 듯이 조작하여 이기붕이 부통령이 됩니다.

부정선거에 분노한 국민들은 당일 마산에서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데, 정부는 이를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와 체포를 하면서 7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중경상을 입게 됩니다.

■ 김주열 열사 희생
시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던 가운데 시위도중 행방불명되었던 마산 상고생 16살 김주열의 시체가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습니다.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에 마산시민들은 시청,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일으켰으며,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에 대한 전 국민의 분노에 불을 지핍니다.


>> 경과

4.19혁명 당시 거리에 운집한 시민들 사이에서 탱크를 타고 도로를 이동하는 진압대 (새창)4월18일 고려대학생 3천여 명이 마산사건의 책임자 처벌, 경찰의 학원출입 금지 등을 담은 ‘4.18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을 향해 시내로 진출하는 평화적 시위를 벌였는데, 귀가하는 학생들에 경찰과 모의한 정치깡패단이 테러를 가했고 이는 그러지 않아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던 국민의 저항을 폭발시킵니다.

익일,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불리는 4월19일, 서울 시내 대학생, 고등학생은 이른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를 시작했고 시민들이 이에 합류합니다. 경찰의 무차별 실탄사격에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정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발표하지만 결국 대학교수단도 반정부 대열에 합류하면서 이승만 전대통령은 4월26일 자진하야를 선언하고 정권은 교체됩니다.


>> 4.19 혁명의 의의

하야 소식에 환호하는 시민들4.19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 정권 타도에 성공한 시민혁명이었습니다. 정권획득이나 찬탈을 위한 무력혁명이 아닌, 부정과 부패에 대항을 꾀하고 자유와 민권에 대한 국민요구, 독재를 용인하지 않는 자주의식을 표출하였습니다.

이는 오랜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단련되고 성장한 민족역량을 보여주었으며 훗날 30여년을 지배해온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기반이자 민주화를 향한 노동, 청년, 학생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학생 및 혁신세력의 평화통일운동 활성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 한계점

이승만 정권 당시 친일세력을 처단하지 않은 것은 정권에 대한 불만요소로 민족분열의 한 축이 되기도 했습니다.
4.19 의거로 집권하게 된 민주당 역시 거센 국민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반민주행위자 처단에 미흡해 민중과 야당의 불만을 샀고 당내분열마저 겹쳤습니다. 아울러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도 부합하지 못했으며 혁명 이후의 사회혼란도 수습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시민의 숭고한 피로 얻은 민주주의는 1년 여 만에 5.16 군사 쿠데타를 위시로 붕괴되어, 다시 기나긴 군부독재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 4.19혁명 관련 기관


4.19 혁명기념 도서관▶ 혁명기념도서관 (http://library.419revolution.org)

4.19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도서관이며, 기존의 정보자원 및 멀티미디어 자료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4.19 사료관을 운영중이며 신문자료, 문서자료, 사진자료, 동영상 자료 등을 볼 수 있습니다.
☞ 4.19혁명 전문 특수도서관, ☎ 02-737-9556


국립 4.19 민주 묘지 홈페이지 (새창)▶ 국립4.19 민주묘지 (http://419.mpva.go.kr)

국립 4.19 민주묘지는 서울시 강북구 4.19 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민주묘지의 역사와 안장안내, 사이버 참배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참배 및 사이버참배 가능, ☎ 02-996-0419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 홈페이지 (새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ttp://www.kdemocracy.or.kr)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는 1948년 이후 민주화 운동 관련 문서와 구술, 시청각, 사진, 물건류, 녹화자료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민주화 운동 관련 각종 행사 소식 제공, ☎ 02-2709-7500



※ 참고사이트 및 서적
4.19혁명 웹사이트 (http://www.419revolution.org)

나라기록포털 (http://contents.archives.go.kr)
기록으로보는 4.19혁명 (
http://theme.archives.go.kr/next/419/sub02.do)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이현주 -


출처:https://www.knowledge.go.kr/jsp/theme/themeView.jsp?themeIdx=7789&dir=al&page=1&searchOption=all&search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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