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연합함대의 사령관이었던 토고 헤이하치로는 승전 축하연 답사에서 이와 같이 말하며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습니다. 일본의 해군 전략연구가인 가와다 고오는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라 하면서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말로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영국의 해군준장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역시 "영국인에게 넬슨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은 시인하기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뛰어난 통솔력과 탁월한 전술, 그리고 투철한 군인정신을 바탕으로 모든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 이순신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인물입니다. 특히 그가 지휘했던 한산도 대첩은 살라미스, 칼레, 트라팔가 해전과 함께 세계 4대 해전에 포함될 정도지요.
충무공 탄신일(4월 28일)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민족의 영웅을 넘어 세계의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순신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시간을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장서각소장 국학자료(http://yoksa.aks.ac.kr)의 도움을 받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순신의 일대기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전쟁놀이를 즐겼던 그는 타고난 통솔력 덕분에 늘 대장 노릇을 도맡아 했으며, 책에서 읽은 작전을 놀이에도 적용했을 정도로 남다른 면모가 있었습니다. 문무에 고루 재능을 갖추고 있었지만, 무과에 인생을 걸기로 결정한 이순신은 군사에 관한 책을 읽고 무예를 연마했습니다.
28세가 되던 해인 1572년 처음으로 무관시험에 응시했으나 시험 중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576년 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무과에 합격한 이순신은 같은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32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북방의 말단 수비 장교로 시작된 그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도 없는데다가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해서 상관들로부터 잦은 모함과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여러 지역을 전전하던 이순신은 전라도감사 이광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었고, 1589년 12월 유성룡의 천거로 정읍현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591년 2월, 47세의 나이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고 군비를 확충했으며 각종 무기를 제작했습니다. 거북선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 임진왜란의 발발
1592년 음력 4월 13일, 700여 척의 함대를 앞세운 일본이 부산포를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을 소집하고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를 수영앞바다에 총집결시켰습니다. 약 3주 뒤인 음력 5월 4일, 함대를 이끌고 출전한 이순신은 옥포, 합포, 적진포 지역에서 해전을 치러 총 42척의 일본 함선을 격파하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어서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여러 해전에서 연이어 승리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593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습니다.
조선에게 잇따라 패하고 명나라까지 참전하자 일본은 조선을 배재한 채 명나라와 3년 9개월에 걸친 강화협상을 전개해 나갑니다. 이 기간 동안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병력을 충원하고 전함을 건조했습니다. 특히 군령 확보를 위해 과거 둔전관으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둔전을 경영하기도 했으며, 어로작업과 소금제작 등으로 수만 석의 군량을 마련하는 능력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1597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신분으로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릅니다. 사형위기에까지 몰렸다가 여러 사람들의 구명운동으로 간신히 방면되지만,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 복직과 마지막 전투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던 원균은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했습니다. 조선 수군이 방어했던 서해안 연안의 항로와 전략적 요충지였던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남아있던 군사의 수는 120명이고 함선은 12척에 불과했지만, 이순신은 전열을 재정비했습니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일본군이 수백 척의 함대를 이끌고 명량 해협으로 접근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새로 건조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함대를 이끌고 나갔습니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이순신은 지형을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명량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자신감을 회복한 반면, 일본은 곤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순신은 고하도, 고금도도 진영을 옮기며 수군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철군을 서두르게 됩니다. 조선과 명의 연합 함대는 1598년 11월 노량 앞 바다에서 퇴각하는 일본군과 마지막 해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이 총탄을 맞고 쓰러집니다. 하지만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염려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54세의 나이에 장렬히 전사합니다.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이자 왜란의 마지막 해전이었던 노량해전은 결국 조선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 주요 해전
■ 한산도 대첩
한산도대첩은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힙니다. 1592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학익진'이라는 전법을 사용하여 적을 무찔렀습니다. 원래 학익진은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의 한 형태였으나 이를 해전에 적용한 이순신은 조선의 함대를 학 날개 모양으로 미리 배치한 다음, 일본군의 배를 그곳으로 유인하여 한꺼번에 발포해 격파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 함대 59척이 침몰했고, 육지로 도망간 400여 명의 일본군도 처형되었습니다. 공로를 인정받은 이순신은 이듬해 8월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습니다.
■ 명량해전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칠천량전투에서 대패했습니다. 또한 160여 척에 달했던 조선의 함대는 전투를 치르면서 거의 모두 격침되었고, 12척만이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으나, 선조는 그에게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싸우도록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전선이 남아있나이다”라고 말한 뒤, 수군의 전열을 재정비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수백여 척의 배를 이끌고 명량 해협으로 왔는데, 이곳은 바다가 좁고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습니다. 새로 건조된 1척을 포함한 13척의 함대를 이끌고 간 이순신은 조류를 이용해 적의 함대를 좌초시키는 전술을 구사하여 무려 31대의 함선을 파괴했습니다.
■ 노량해전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 조정에서는 11월까지 퇴각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조선과 명의 연합함대에 길목이 막힌 일본군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6만 여명의 수군과 50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적의 함대가 노량을 통과하리라는 사실을 예측한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서 함대를 기다렸습니다.
이튿날인 음력 11월 19일 새벽, 일본 함대 500여 척이 노량에 나타나자 매복해 있던 이순신의 함대들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명나라 수군까지 합세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격렬히 항전하던 적의 총탄을 맞아 쓰러졌고,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조선과 명의 공격을 받은 일본은 겨우 50여 척의 함대만을 이끌고 간신히 도주했습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간의 긴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 조선의 전함
■ 판옥선
'판자로 지은 집이 있는 배'라는 뜻의 판옥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전투용 함선입니다. 화기로 무장한 일본 함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어진 판옥선은 기존의 맹선(猛船)과는 달리 갑판 위에 상갑판을 올린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노군(櫓軍)들이 상·하 갑판 사이의 안전한 장소에서 마음 놓고 노를 저을 수 있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투병들이 상갑판(上甲板) 위에서 효과적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또한 판옥선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많은 남서부 해안에서 효율적으로 항해 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학익진’을 펼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 거북선
거북선은 돌격선의 역할을 했던 견고한 함선입니다. 그 모양이 물에 떠 있는 거북이의 모습과 유사하다 하여 '거북선'이라 불렸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에게는 공포의 대명사로 여겨졌습니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거북선은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 장군이 고안하고 그의 휘하 장수 중 한명이었던 나대용이 건조했다고 전해집니다. 대못을 박은 판자를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어 덮었고 배의 앞부분에는 용의 머리를, 그리고 뒷부분에는 꼬리를 달았습니다. 당시 일본 수군은 상대편의 배에 접근하여 승선한 뒤 백병전을 벌이는 전법을 주로 구사했습니다. 하지만 거북선 축조 이후에는 그러한 전법을 사용할 수 없었지요.
거북선은 사방에서 포를 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으며 용머리 안에도 총통이 있었습니다. 이는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하는 돌격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밑을 평평하게 만들어 남해나 서해와 같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에서 움직이기 적합했고, 급속한 180도 회전이나 좌우로의 방향전환이 가능해 학익진과 같은 다양한 전법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습니다.
>>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 7년에 걸쳐 기록한 일기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 아니었기 때문에 본래 이름이 없었지만, 1795년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난중일기>는 두 가지의 전적이 있는데, 하나는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이순신의 친필 초고로, 모두 7책 205장이 전해지며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것인데 모두 4권(권5~권7)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친필 초고와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일기를 비교해보면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초고를 베낄 때 글의 내용을 많이 생략했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이충무공전서>에는 실렸지만 초고에는 없는 내용도 있습니다. 따라서 <난중일기>의 내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친필 초고를 기준으로 <이충무공전서>의 내용을 참고해야 합니다.
비록 한 개인이 남긴 일기이지만, <난중일기>에는 전란(戰亂)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전략 및 전술회의, 지형정찰, 군사훈련, 수군 통제전술, 국정에 대한 솔직한 생각, 부하들에 대한 상벌 등에 대한 기록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료로 꼽힙니다. 또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인간적인 고뇌, 나라에 대한 깊은 충정, 신변의 자질구레한 일들이 드러나 있어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와 인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 관련 정보
■ 성웅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사이트로서, 이순신의 생애 및 임진왜란, 거북선, 난중일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순신 탐구와 문화유산, 축제유산, 학습관 등의 메뉴를 통해, 성웅 이순신에 대해서 좀 더 편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 홈페이지 (http://www.e-sunshin.com)
■ 세계속의 이순신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21세기 이순신 양성'을 모토로 운영되고 있는 홈페이지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 및 영향력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해외에 잘못 알려진 이순신 장군에 대한 오류와 시정방안 절차에 대한 방안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 홈페이지 (http://yisunsinkr.prkorea.com)
※ 참고사이트
이순신 (http://yisunsinkr.prkorea.com/index.htm)
충무공 이순신 (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
성웅 이순신 (http://www.e-sunshin.com/e-sunshin/main/main.jsp)
임진왜란 불패신화 (http://www.yi-sunsin.com/main)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주유정 -
'공부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전통 건축물의 건립 시기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0) | 2012.05.10 |
---|---|
[스크랩] 풍성한 이야기가 운율에 깃든 예술, 가사 (0) | 2012.05.09 |
[스크랩] 다시 돌아보는 혁명 정신, 4.19혁명 (0) | 2012.04.24 |
[스크랩] 기호 유학을 돌아보다 (0) | 2012.03.02 |
[스크랩] 한옥, 이상과 지혜가 결합한 친자연적 가옥 (0) | 2012.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