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벽화, 그림을 입은 벽

깜보입니다 2011. 8. 12. 16:22

요즘엔 어디를 가나 벽화를 볼 수 있습니다. 잿빛 도시에 색을 입히고 버려진 공간을 예술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벽화는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미술로, 주변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고 일상생활 속에서 예술을 향유할 수 있어 최근 몇 년 사이에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여기에 예술가들은 물론 지역 주민과 학생, 자원봉사자들까지 참여하면서 전국 각지에 벽화거리가 조성되고 있는 상황이지요.

거리 벽화 (새창)
거리 벽화
    출처: KTV한국정책방송원(행정정보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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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다채로운 벽화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요즘,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문화예술 종합정보 DB (http://www.culture.go.kr)'의 도움을 받아 벽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벽화의 의미와 특징


벽화란 벽면에 그리는 그림으로, 동굴의 내벽은 물론 고분·궁전·사원·교회 등과 같은 인공 건축물의 내외벽면과 천장, 기둥에 그린 그림까지도 포함합니다. 건축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벽화는 시대, 기법, 재질, 종교, 목적 등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크게 바위 면에 직접 그리는 ‘조지벽화(粗地壁畵)’, 그림을 그릴 면에다 흙이나 회를 바른 뒤 그 위에 그리는 ‘화장지벽화(化粧地壁畵)’, 그리고 테라코타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뒤 그것을 벽에 붙이는 ‘첨부벽화(添附壁畵)’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기법에 의한 분류도 가능한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프레스코와 세코가 있습니다. 프레스코 기법은 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수용성 물감으로 그리는 것으로, 물감이 석회에 스며들기 때문에 내구성이 매우 뛰어나며 독특한 색감과 광택이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세코 기법은 벽에 바른 석회가 완전히 마른 상태에서 접착제와 혼합한 물감으로 그리는 것을 말합니다. 석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마무리해야 하는 프레스코와는 달리,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세코는 보다 섬세한 표현이 가능한 기법이지만 보존 기간이 짧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규모가 크고 복잡한 벽화에서는 프레스코와 세코 기법이 함께 쓰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Bâmiyân 프레스코 벽화 (새창)
Bâmiyân 프레스코 벽화
    출처: 한국관련 서양고서 원문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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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벽화는 경배와 주술의 대상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건물을 아름답게 꾸미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글을 읽고 쓸 줄을 몰랐기 때문에 벽화는 신의 말씀이나 교리 등을 가르치기 위한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실제로 교회나 사찰 등에 그려지는 벽화는 종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근대로 오면서 벽화는 대중을 계몽하고 각성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디에고 리베라가 주도한 멕시코 벽화운동입니다. 1970-80년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벽화 역시 문명비판과 재개발, 인종문제 등 각종 사회·정치적인 이슈를 담고 있어 대중의 인식 변화와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큰 몫을 담당했습니다. 오늘날의 벽화는 도시환경을 바꾸고 사람들의 정서를 표현하는 공공미술로서의 개념이 강하며, 전문가들은 물론 지역 주민과 자원봉사자 등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 벽화의 역사


회화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서 모든 시대와 지역에 걸쳐 존재해온 벽화는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로 소, 말, 노루, 산양, 사슴 등의 야생동물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는데, 여기에는 동물이 많이 번식하여 사냥감이 풍성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알타미라와 라스코 벽화로 대표되는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는 인물과 동물, 산수(山水)를 간결하게 표현했지만, 그림의 수준이 매우 높아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스코 동굴의 '누워있는 크로마뇽인과 들소' (새창)
 라스코 동굴의 '누워있는 크로마뇽인과 들소'   
    출처: 이종호. "크로마뇽인이 그린 그림 라스코 동굴 벽화".
            과학과 기술. 383권, 2005년 3월호 (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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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발달하면서 벽화는 궁전이나 신전 등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소들은 일반 백성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벽화는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되었고, 그 자체로 권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의 벽화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분묘에 그려진 그림인데, 무덤 주인의 업적과 그의 일상생활은 물론 사후세계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내세관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로마시대로 접어들면서 벽화는 개인 건물은 물론 공공건물에도 그려지기 시작했고, 그림의 주제도 한층 다양해졌습니다. 그러나 벽화가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바로 르네상스 시대였습니다.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유명 가문들은 경쟁적으로 벽화 제작에 열을 올렸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뛰어난 화가들의 활약에 힘입어 벽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벽화를 통해 벽이 아닌 다른 공간이 실재하는 듯 한 느낌을 표현하려 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바로크 양식이 풍미하던 17세기로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는 유럽 전역에 걸쳐 왕궁과 귀족들의 저택이 사회와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었던 탓에 벽화 제작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벽화는 그 양식이나 기법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고, 이는 19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한동안 침체되어 있던 벽화 제작이 다시금 활발해진 건 20세기부터인데, 사람들의 의식이 발전하고 공공의 이익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벽화 역시 일반인들의 정서와 공익을 위한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해석과 더불어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표현 양식도 허용되면서 보다 다채로운 벽화들이 제작될 수 있었습니다.



>> 우리나라의 벽화


우리나라 벽화의 역사는 선사시대에 만들어진 바위그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흔히 ‘암각화'라고도 부르는 바위그림은 돌이나 금속제의 도구를 사용하여 바위의 표면을 쪼아 내거나 그어서 동물, 인물, 또는 기하학적 문양 등을 새겨 놓은 것을 말하는데, 이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하천이나 바다와 연결된 산의 바위 절벽에 새겨진 암각화는 사냥감이 풍성해지고 사냥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주술적·종교적 목적으로 새겨졌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단순히 자신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것이라는 설과 후손들에게 짐승에 관한 지식과 사냥방법 및 분배법칙 등을 가르치기 위한 교본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러한 암각화는 대부분 경상도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있습니다.

조각이 아닌 회화 형태의 벽화가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로, 당시에는 주로 지배충의 무덤 내부 벽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무덤 안에 그린 그림을 ‘고분벽화’라 하는데, 그림의 내용은 무덤 주인의 모습과 생활상을 그린 것에서부터 사신(청룡·백호·주작·현무)을 그린 것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무덤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죽은 사람의 사후세계를 위해 제작된 고분벽화는 고대의 회화 양식은 물론,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사상·종교·생활풍습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능산리고분 벽화 (새창)
능산리고분 벽화
    출처: KTV한국정책방송원(행정정보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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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발견된 고분벽화의 90% 이상은 고구려 시대에 그려진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 고분벽화가 고구려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백제와 가야, 신라로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덤 속에 그림을 그리는 전통은 발해와 고려, 조선시대 초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무덤 내부에 그려지던 벽화는 점차 사찰에도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법당이나 전각 등 사찰 건물 안팎의 벽에 그려진 그림의 내용은 대개 예배의 대상인 불·보살 등의 존상과 불교의 교리적 내용, 석존의 전생이야기 등 불교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그림을 '사찰벽화'라고 하는데, 이는 대중을 교화하고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찰벽화로는 부석사(浮石寺) 조사당의 벽화, 수덕사(修德寺) 대웅전 벽화,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 위봉사(威鳳寺) 보광명전의 벽화, 문수사(文殊寺) 극락전벽화, 흥국사(興國寺) 대웅전벽화, 선운사(禪雲寺) 대웅전 삼신후불벽화 등이 있습니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 (새창)
부석사 조사당 벽화
    출처: 유교문화 종합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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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의 유명 벽화거리


> 홍대 벽화거리


지난 1993년, 홍익대학교 총학생회에서는 예술과 대중의 소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고자 ‘거리미술전'을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미술대학교 학생들이 상수동 골목에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이것이 바로 벽화거리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톡톡 튀는 상상력과 개성 넘치는 그림들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홍대 앞의 명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골목골목 숨어 있는 벽화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여 주말이면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지만, 홍대 인근 지역에 비해 북적거리지 않아 여유롭게 거닐기 좋습니다.

홍대 벽화거리 (새창)
 홍대 벽화거리   
    출처: KTV한국정책방송원(행정정보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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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다리 골목 벽화거리


동인천역과 도원역 사이에 있는 배다리 골목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지난 2007년 재개발과 도로 건설이 추진되면서 배다리가 사라질 위험에 처하자 동네를 지키려는 주민들과 그 뜻을 같이하는 문화예술집단 ‘퍼포먼스 반지하'가 힘을 모아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 바로 벽화그리기였습니다. 칙칙한 담장에 그림을 그리고 버려진 공터를 쉼터와 텃밭으로 바꾸면서부터 배다리 골목은 벽화거리로 거듭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인천의 출사명소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 통영 동피랑 마을
통영 동피랑 마을 (새창)
통영 동피랑 마을
    출처: 네이버캐스트 "통영 동피랑"                        ☞ 바로가기

통영항 중앙시장 뒤쪽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동피랑 마을은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형형색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한국의 몽마르뜨'라 불리는 곳입니다. 한때 철거 위기에 몰렸던 이 작은 마을은 지난 2006년 한 시민단체에서 개최한 공모전을 계기로 벽화마을로 재탄생하게 되었는데, 당시 공모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낡은 담벼락에 독특하고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허름했던 달동네는 바닷가 벽화마을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결국 통영시는 이곳을 보존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 고소동 천사 벽화거리


전남 여수에서 가장 오래된 산동네인 고소동 골목길이 천사 벽화거리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천사'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벽화거리로 조성될 골목이 총 1004m 에 이르기 때문인데, 현재 여수시에서는 이곳을 7개 구간으로 나누어 다양한 테마의 벽화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벽화의 내용은 여수의 역사, 문화, 생활, 엑스포 등에 관한 것이며, 현재까지 완공된 구간은 1구간 70m와 2구간 160m 입니다. 여수세계박람회를 대비하여 골목길의 환경을 개선하고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추진된 이번 벽화거리 조성사업은, 고소동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진행되고 있어 시작 단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 감천동 태극마을
감천동 태극마을 (새창)
 감천동 태극마을   
    출처: 네이버캐스트 "부산 감천동 태극마을"        ☞ 바로가기

부산시 사하구 감천동에 위치한 태극마을의 유래는 한국전쟁 당시 태극도 신도 4천여 명이 집단으로 정착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을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무려 2만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지금은 1만 명 정도가 모여살고 있습니다. 경사진 비탈길을 따라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곳은 지난 2009년에 진행된 마을미술 프로젝트를 계기로 알록달록한 벽화와 독특한 조각품들로 채워지게 되었고,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부산의 명소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마을 주민들과 지역 예술가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의 적극적인 노력 덕분에 문화마을로 거듭난 태극마을은 재건축과 재개발이 아닌 방법으로도 도시 재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 참고사이트

ㅇ 다음 & 네이버 백과사전
ㅇ 문화재청 (http://www.cha.go.kr)
ㅇ 북한문화재자료관 (http://north.nricp.go.kr/nrth/kor/inx/index.jsp)

 

>국가지식포털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한국의재발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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