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객의 고독한 자아, 생사의 기로에 서서
1801년 신유박해와 곧 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산은 생사의 기로에 서고 가문마저 풍비박산 나고 만다. 셋째 형 정약종은 참형을 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과 자신은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유배길에 올랐던 것이다. 유배지 강진에 있던 다산은 흑산도에 있던 중형에게 수시로 편지를 부쳐 자신의 심정을 알렸다. 다산은 편지에 일상의 정감에서부터 학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담았다.
재작년 해남에서 벗 윤영희尹永僖를 만났습니다. 제가 ‘죽지 않고 이렇게 서로 만났으니 이상도 하네.’라고 했더니, 윤영희가 ‘죽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죽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네.’라고 했더니, 그가 ‘죄악罪惡이 다한 연후에 사람이 죽는 거네.’라고 하였고, 저는 ‘복록福祿이 다한 이후에 사람이 죽는 거라네.’라고 말을 주고받다가 서로 웃고 그만 두었습니다. 그가 말한 ‘죄악이 다한 연후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대체로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만, 이것은 바로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는 말로 진정 도道를 안다는 사람의 말은 아닐 것입니다.
- 답중씨答仲氏
유배객 다산이 세상과 단절된 상황에서 오로지 소통할 수 있는 존재는 중형仲兄인 정약전이 유일하였다. 자신이 있던 유배지와 건너 흑산도에 있던 정약전은 다산의 지기知己이자 스승이었으며, 형제이자 벗이었다. 다산은 편지에서 해남에서 벗을 만난 느낌과 주고받은 내용을 적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절친한 벗과 만날 수 있었다는 말로 자신의 참담한 처지와 함께 반가운 심정을 전하였다. 이는 이렇게라도 살고 있노라면 그리움에 사무치는 중형과 언제가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심정의 역설적 표출이기도 하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만난 벗과 나눈 대화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생사로 대화를 나눈 것 자체가 절망 속에 사는 유배객의 심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다산은 ‘죄악’의 유무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복록’의 유무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는 것으로 삶을 방향을 표하고 있다.
이는 유배객의 처지로 인생의 행보를 정리한 결과이다. 비록 절망 속에서 살지만 누구도 탓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고 한다. 하지만 살고 죽는 것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유배지에서 다산은 죽음마저 초월하여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삶의 견결한 의지를 보여준다. 다산은 어떠한 고통이 있더라도 세상을 탓하거나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벼랑 끝에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절망 속에서 지핀 희망의 불씨
유배객으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는 지혜는 무엇이었을까? 다재다능한 다산이고 보면, 자신의 실존을 증명할 방식을 저술 작업에서 찾았다. 다산은 유배기간 동안 시종 저술활동을 하고, 그 과정에서 정약전과 끊임없이 편지로 토론하였다.
책을 저술하는 이 한 가지 일은 절대로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오니, 반드시 십분 유의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해족도설海族圖說』은 무척이나 기이한 책으로, 이 또한 하찮게 여길 것은 아닙니다. 도형圖形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로 쓰는 것이 그림을 그려 색칠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학문의 종지宗旨에 대해 먼저 그 대강大綱을 정한 뒤 책을 저술하여야 유용하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이 도리는 효제孝弟로 근본을 삼고 예악禮樂으로 꾸미며, 감형鑑衡·재부財賦·군려軍旅·형옥刑獄을 포함하고, 농포農圃·의약醫藥·역상歷象·산수算數·공작工作의 기술을 씨줄로 하여야 완전해질 것입니다. 대체로 책을 저술할 때 항상 이 항목을 살펴야 하거니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굳이 저작할 필요도 없습니다. 『해족도설』은 이 항목으로 살펴볼 때 일부 연구가의 수요가 될 것이니 그 활용은 매우 절실합니다.
- 상중씨上仲氏
다산은 절망적 환경을 저술로 재탄생시키는 것으로 바꾸었다. 다산이 저술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던 정약전에게 저술을 통해 삶의 의미를 모색할 것을 권하였다. 마침내 다산의 설득으로 정약전은 저술을 결심하고 그 초고를 다산에게 보내었다. 다산은 중형에게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진하였다. 정약전이 보낸 『해족도설』은 물고기와 해초 따위에 그림을 덧붙이고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바로 『현산어보玄山漁譜』의 초고본이다. 편지에서 다산은 중형의 초고를 두고 항목의 중요함과 분류한 항목의 활용 가능성을 적극 예상하고 있다. 실학자다운 시각과 학문적 자세다. 절망과 고단한 유배생활이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굴하지 않고 연구와 저술로 삶의 희망을 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다산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이 점에서 다산이 유배지에서 이룬 저술과 업적은 절망의 환경을 극복한 시대의 마음이자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저술과 업적은 유배 체험과 시간이 가져다 준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저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실존의 외침이었을 지도 모른다.
글 · 진재교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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