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는 마을과 마을, 길과 길, 사람과 사람을 이어줍니다. 칠석이면 견우와 직녀는 오작교 위에서 서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내려왔을 때 왕비 노국공주가 개천을 건너지 못하자 마을의 부녀자들은 허리를 굽혀 ‘놋다리’를 놓았습니다. 염라대왕이 저승으로 건너온 사람에게 “미내다리를 보았는가”라고 묻는다는 전설이 논산 강경일대에 전해져 옵니다. 이밖에도 누군가는 그리운 이를 만나는 설렘으로, 어떤 이는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이고, 또 다른 사람은 유배지로 떠나는 중에 묵묵히 다리를 건넜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많은 건 옛사람들에게 다리가 물리적 구조물 그 이상이었음을 뜻합니다. 강이나 내를 건널 수 있게 하는 구조물, 다리에 대해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문화재 학술조사 연구정보 DB (http://www.nricp.go.kr)'와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http://yoksa.aks.ac.kr)'의 도움을 받아 알아보겠습니다.
>> 다리의 기원 및 종류
신석기 혁명 이후 인류는 농사나 고기잡이에 수월한 강 주위나 바닷가에 모여 살았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여러 사람의 발이 닿은 곳은 길이 됐습니다. 개천이나 발이 빠져 이동하기 힘든 곳에는 통나무나 큰 돌을 띄엄띄엄 놓았는데, 이것이 다리의 시초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징검다리 (ex. 암태도 징검다리 등)
징검다리는 얕은 강물이나 늪지에 돌 또는 흙더미를 드문드문 놓아 건너다닐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마을의 작은 개울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때로는 갯벌에 길게 놓아 갯일 할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대개 징검다리는 길이가 길지 않습니다. 좁고 얕은 개울에 발이 젖지 않을 정도로 놓여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전남 신암군 암태도에 있는 징검다리는 2.5km 길이에 돌 6,000여 개가 놓여 장관을 이룹니다. 밀물 때는 볼 수 없고, 썰 물 때면 다리가 형체를 드러냅니다.
> 나무다리 : 널다리, 섶다리
나무로 만든 다리의 형식과 모양은 다양합니다. 간단한 것은 내 양쪽에 통나무를 하나, 둘 놓은 것으로 폭이 좁아 교행이 안 되기 때문에 외나무다리라고도 합니다. 강폭이 넓을 때에는 나무기둥을 강바닥에 박아 교각을 세우고 교각에 멍에목을 건너지른 다음 멍에목 사이에 널판을 깔아 만듭니다. 이를 널을 깔아 만든 다리라고 해 널다리라고 합니다. 경복궁 향원정의 널다리는 돌로 만든 교각과 멍에 위에 나무로 귀틀을 건너지른 다음 청판을 깔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양쪽에는 나무난간까지 갖춘 격식 있는 나무다리입니다.
널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곳에서는 멍에목에 통나무를 건너지른 다음 솔가지나 나뭇가지들을 깔고 위에 흙을 덮어 놓는데 이를 섶다리라고 합니다. 대개 주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던 섶다리는 배로 오가기 힘든 겨울을 나기 위해 놓은 다리로 겨울을 나고 이듬해 여름철 홍수로 무너지면 그 수명을 다 합니다. 놓고, 허물어지고, 떠내려가기를 반복하지만 다리를 놓을 때면 마을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잔칫날이 되곤 해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한편, 나무다리는 시공이 쉬워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었지만 약하고 수명이 짧아 남아 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 평석교 (ex. 수표교, 광통교, 닭실마을 청암정 등)
교각을 세워 그 위에 다리 상판을 평평하게 깐 다리 형식을 말합니다. 간단한 것은 개울 폭이 좁은 경우 판석을 하나 놓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강폭이 넓어지면 중간에 교각을 세우고 교각위에 멍엣돌을 건너지른 다음 여기에 의지해 판석이나 장대석을 연결해 깔아나갑니다. 닭실마을 청암정 돌다리는 멍엣돌 위에 긴 장대석 하나만 놓은 사례입니다. 조선시대 한양의 평석교 유적으로는 수표교, 광통교, 살곶이다리 등이 남아 있고, 지역에서는 보령의 한내다리, 논산 원봉리다리, 벌교 도마교, 선죽교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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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표교 (水標橋) 출처: 문화재 학술조사 연구정보 DB ☞ 바로가기 |
> 홍예교 : 무지개다리 (ex. 만안교, 창경궁 옥천교, 불국사 청운교, 미내다리 등)
홍예교는 반원형으로 홍예를 틀고 그 위에 상판을 깔아 만든 다리입니다. 강폭이 넓은 경우 홍예를 여러 개 틀어 연결해 사용하는데 다리 규모는 홍예숫자를 칸수로 헤아려 계산합니다. 창경궁 옥천교는 홍예가 2개인 2칸 홍예교고, 정조의 능행을 위해 놓았다는 안양의 만안교는 7칸 홍예교입니다.
홍예석 하단에는 선단석, 또는 홍예기석이라 부르는 받침돌을 놓습니다. 홍예가 여러 개 반복되는 곳에서는 양쪽 홍예석을 동시에 받칠 수 있도록 선단석은 큰 돌을 씁니다. 또 선단석은 물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끝을 뾰족하게 마름모꼴로 만듭니다. 선단석 위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홍예석을 이용해 홍예를 트는데 홍예의 가장 위쪽 꼭지점에 올라가는 홍예석을 특별히 홍예종석이라고 합니다. 홍예종석은 때로 멍엣돌처럼 약간 튀어나오게 해 용머리 등을 조각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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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안교 전경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 배다리 : 부교
배다리는 교각을 사용하지 않고 배나 뗏목 따위를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판지를 깔아서 만든 다리입니다. 조선시대 왕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지 않았는데, 때문에 강을 건널 일이 생기면 임시로 다리를 설치했습니다. 왕이 한강을 건널 때면 큰 배 70여 척을 가로로 이어 서로 묶은 뒤 그 위에 널판지를 깔아 5~6필의 기마가 옆으로 서서 자유로이 건널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임시다리지만 난간을 만들고 단청까지 설치한 격식 있는 다리로 배다리를 놓을 때는 이를 주관하는 관청을 별도로 세웠다고 합니다. 현재 한강대교 자리에 놓았던 이 다리는 조세선을 비롯한 관선과 상인들의 상선은 물론 백성들의 배도 부역으로 동원됐습니다. 다리를 놓는데 한 달, 푸는데 한 달이 걸리는 바람에 강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답니다.
> 누교 (ex. 송광사 청량각, 태안사 능파각 등)
누교는 다리 위에 누각이 있는 경우입니다. 이 때 다리는 통로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정자와 같은 공간으로 기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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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사 능파각 전경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 조선의 역사가 얽혀 있는 청계천 다리들
> 신덕왕후의 능을 지키던 병풍석이 쓰인 '광통교(광교)'
신덕왕후는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조선 3대왕 태종 이방원의 계모였습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장자가 아닌 자신이 낳은 아들 방석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습니다. 조선건국 전에 죽은 신의왕후의 아들인 방원은 신덕왕후가 죽은 뒤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배다른 형제인 방번, 방석을 죽이고 왕좌에 앉은 태종은 덕수궁 인근에 있던 신덕왕후 무덤을 도성 밖으로 옮겨버립니다. 이장하면서 능을 구성하던 석재들을 대부분 버려두었는데, 후에 나무 다리였던 광통교가 큰 비로 무너지자 이를 돌다리로 바꾸는데 이 석재를 사용합니다. 이런 이유로 신덕왕후의 능침을 감싸던 병풍석은 현재 청계천 광통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광통교는 1958~1961년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사라졌고, 2003년 시작된 청계천 복원공사로 원래 있던 곳보다 상류에 다시 복원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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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 광통교 복원 준공식 출처: 행정정보DB ☞ 바로가기 |
>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별한 '영도교'
단종은 조선 6대 임금으로 11살에 왕위에 오른 뒤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왕입니다. 1457년 청계천 영도교에서 유배지 영월로 떠나는 단종과 정순왕후는 이별합니다. 유배를 떠난 후에도 자살을 강요받던 단종은 그해 10월 24일 16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습니다. 이후 정순황후는 청룡사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했고 1521년 6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영도교에서 헤어진 단종과 정순왕후는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연으로 인해 영도교는 ‘영영 이별 다리’, ‘영영 건너간 다리’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영도교는 조선시대 말까지 서울 외곽의 주요 다리 역할을 했지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다리를 부수어 궁궐의 석재로 써서 사라졌습니다. 대신 같은 자리에 나무다리를 놓았지만 물난리가 있을 때면 다리가 떠내려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영도교의 이름과 위치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다리의 구조나 형태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영도교는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새롭게 세워졌습니다.
> 팽형을 집행하던 '혜정교'
조선시대 혜정교에서는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를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팽형’이 집행됐습니다. 팽형은 사람을 삶아 죽이는 형벌로, 집행과정은 먼저 혜정교 한 가운데 임시로 부뚜막을 만들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만한 큰 가마솥을 겁니다. 솥에는 물을 붓고 아궁이에는 불을 땔 수 있도록 장작을 넣습니다. 정작 팽형이 시작되면 불 지피는 시늉만 하고 실제로 불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마솥 안에 든 죄인은 그때부터 살았지만 죽은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팽형이 끝나면 가족들은 죄인을 데려가 장례를 치르고, 호적이나 족보에는 죽은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생물학적으로 살았으니 다른 이들처럼 생업에 종사할 수 있고, 아이도 낳을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죽은 탓에 죄인의 아이는 아비없는 사생아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중학천이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종로 쪽에 놓인 다리였던 혜정교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터만 남아 있습니다.
>>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다, ‘불이문(不二門)’
> 흥국사 '홍교' (보문 제563호, 전남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 지눌이 창건한 절입니다. 흥국사(興國寺)는 이름 그대로 나라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사찰로 국가와 절을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흥국사는 승병 훈련소였고, 의승군의 본거지로 4,000여 명의 군이 주둔했습니다. 호국 불교의 중심지중 하나였던 흥국사는 왜군에 의해 많이 파괴됐고, 결국 전쟁 중에 전소됩니다. 왜란이 끝난 후 흥국사는 인조 17년(1639년)에 계특대사에 의해 다시 세워집니다.
초기의 흥국사는 일주문이 없어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사천왕의 보호를 받는 불법의 세계로 들어옴을 상징했다고 전해집니다. 따라서 이후에 축조된 홍교는 세속과 불국토의 갈림길이며 흥국사의 불이문이 됐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다리는 단순한 교통로 이상이었습니다. 다리 이쪽과 저쪽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홍교가 걸린 이쪽과 저쪽의 세상은 달랐습니다. 홍교는 출가하는 비구에게는 도를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였으며, 전장으로 향하는 의승군에게는 적을 몰아내기 전까지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 호국정신을 굳건히 하는 다리였습니다.
흥국사 홍교는 단칸으로 길이 40m, 높이 5.5m입니다. 장대석 위로 거대한 판석을 올린 후 흙을 덮어 사람과 짐의 무게를 거뜬히 지탱함과 동시에 통행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했습니다. 흥국사에서는 매년 홍교 밟기 축제가 열립니다. 다리를 밟으면 1년 동안 다리 병을 막을 수 있고, 12개 다리를 밟으면 1년 12달 모두 액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어 전해진 풍속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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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국사 홍교 출처: 행정정보DB ☞ 바로가기 |
> 건봉사 '능파교' (보물 제1336호,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우리나라 땅 최북단의 금강산 감로봉에 들어선 건봉사는 1500년이라는 역사를 간직한 사찰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는 당시 70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을 만큼 큰 절인 이곳을 의승군의 거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건봉사는 한국전쟁 당시 남북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동안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됐고, 수십 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됐습니다. 이후 1989년 통제가 해제됐습니다. 건봉사에는 모두 5개의 홍교(능파교/산영교, 극락교, 청련교, 문수교, 백운교)가 축조되었습니다. 지금 있는 홍교는 능파교, 청련교, 문수교입니다. 이 가운데 대웅전과 극락전을 연결하는 ‘능파교’는 고해의 파도를 헤치고 해탈로 나아가는 다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리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높이 5.4m입니다. 다리 중앙 부분에 홍예인 큰 아치를 틀고, 좌우에 장대석으로 축조해 다리를 구성했습니다. 능파교는 단칸 홍예교로 자연지형을 잘 이용해 만들었고,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이 있어 홍예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 불국사 '백운교'·'청운교', '연화교'·'칠보교' (국보 제23호, 국보 제22호, 경북 경주시 진현동)
‘구름을 마시고 토한다’는 토함산 중턱에 있는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던 김대성이 창건해 현재까지 법통을 이어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불국사는 임진왜란으로 사찰 전체가 불에 타 없어지거나 약탈당해 1920년 이전까지는 일부 건물과 탑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복구와 보수를 통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불국사 경내에는 돌 축대 앞면 두 곳에 돌다리를 가설해 법당으로 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동쪽에 있는 2단의 돌계단 중 위쪽이 백운교, 아래쪽이 청운교입니다. 백운교는 중앙에 능선을 두고 좌우로 18개의 돌계단을 설치했습니다. 백운교와 청운교가 이어지는 중앙에는 홍예의 통로를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했습니다. 이 홍예로 층층다리의 위아래가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청운교는 16단으로 구성양식은 백운교와 동일합니다. 한편, 연화교와 칠보교는 백운교와 청운교보다 다리 경사가 완만합니다. 연꽃잎이 새겨진 아래쪽 계단이 연화교이고, 위쪽이 금·은·수정·유리·산호·마노·호박의 7가지 보석의 다리를 뜻하는 칠보교입니다. 이 계단을 지나서 안양문을 통과하면 극락전에 다다릅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부처의 세계이며 지상에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입니다. 불국사에 있는 조형물 하나하나에는 이를 표현하는 상징과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불국사에 놓인 네 개의 다리는 석축을 쌓아 구분해 놓은 범부의 세계에서 부처님 나라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불국사 돌다리는 현존하는 신라시대 다리로는 유일하며 국내에서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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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국사(佛國寺) 청운교·백운교 출처: 문화재 학술조사 연구정보 DB ☞ 바로가기 |
▶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전경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다리에 얽힌 이야기
> 쌀 천석으로 만든 돌다리 (경남 거창군 마리면)
거창군 마리면 고학리 용원정 앞 계곡에는 자연석으로 된 돌다리가 있습니다. 이곳은 옛날 한양으로 통하는 삼남대로였는데, 마을 앞에 깊은 계곡이 있어 오가는 길손들의 불편함이 컸습니다. 이 마을의 오성재, 오성화 형제는 백미 천석으로 인부를 사서 다리를 놓아 많은 이들의 불편함을 덜어주었고, 길이 11m, 폭 1.2m, 높이 2m의 돌다리는 ‘쌀다리’로 불리게 됐습니다. 1758년에 축조된 이 다리는 양쪽에 석축을 쌓고 개천 중간에 교각을 세워 한 장의 판석을 상판에 깔았습니다. 용원정 옆에는 형제의 덕을 기리는 시혜불망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그대는 미내다리를 아는가? (충남 유형문화재 지방유적 제11호, 충남 논산시 채운면)
젓갈 산지로 유명한 강경은 조선시대 전국의 3대 시장으로 꼽힐 만큼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옛사람들의 발이 닿았던 강경천 제방을 따라가면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놓인 미내다리를 볼 수 있습니다. 본래 미내다리는 논산시 강경읍 신양리에 있었지만 2002년 복원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강경천은 예전에 미내 혹은 미하라고 불렸는데, 미내다리란 이름은 여기서 따온 것입니다. 미내다리는 3개의 홍예 모양으로 쌓아 올렸으며 가운데 홍예가 가장 큽니다. 가운데 홍예의 정상부 종석에는 액을 막을 요량으로 호랑이상과 사자상을 새겨 넣었습니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그대는 미내다리를 아는가? 그렇다면 건너 본 적은 있는가?”라고 물어본다고 합니다. 한때 삼남 제일의 다리였던 미내다리는 염라대왕 입에 오를 만큼 유명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미내다리에는 전해져 오는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다리가 없을 때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하는 불편함을 덜기 위해 마을에서는 두 청년에게 다리 공사를 맡겼습니다. 집집에서 모아 준 돈으로 다리를 다 놓은 청년들은 남은 돈을 어떡할지 고민했습니다. 결국 두 청년은 남은 돈을 다리 보수자금으로 쓰기로 하고 근처에 묻어둡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청년 중 한 사람이 병을 얻어 앓게 됩니다. 이에 다른 청년은 가난한 친구를 살리려고 다리 밑을 살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 청년은 병든 친구가 자기 몰래 돈을 꺼내 갔다고 짐작하면서도 짐짓 모른척하며 친구의 병이 낫기만을 빌었습니다. 하지만 병세는 갈수록 악화됐고, 급기야 청년은 큰 구렁이로 변해버렸습니다. 구렁이로 변한 청년은 집을 나와 미내다리 밑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 구렁이를 동정하지 않았고, 친구 몰래 돈을 훔쳤다고 욕했습니다. 비오는 날이면 구렁이는 가끔씩 다리 근처에 나와 눈물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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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강경 미내다리 전면 출처: 문화재 학술조사 연구정보 DB ☞ 바로가기 |
※ 참고문헌 및 참고사이트
ㅇ『천년 후, 다시 다리를 건너다』손광섭, 이야기꽃, 2003
ㅇ『옛 다리, 내 마음속의 풍경』최진연, 한길사, 2004
ㅇ『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김왕직, 동녘, 2007
ㅇ 서울특별시 한강사업본부 (http://hangang.seoul.go.kr/hanganglooks/hanganglooks03_01.html)
ㅇ 개미실 사랑방 (네이버 블로그) (http://roaltlf.blog.me/121484218)
ㅇ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ㅇ 디지털논산문화대전 (http://nonsan.grandculture.net)
>국가지식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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