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공력이 어울려 거듭나는 다도
초의선사(조선 후기의 대선사로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한 인물)는 20가지 절목으로 분류하여 다도茶道라는 행위를 언급하고 있다. 다도는 뻐꾹새 울음소리가 먼 산비탈에 내려앉는 4월의 곡우穀雨를지나 아침 안개를 머금고 있는 신선한 찻잎을 수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연의 산물인 여린 찻잎을 잘 골라 차를 만드는 일은 보통 공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작업이다. 지난해 가을 산자락에서 베어 온 자잘한 땔감을 가을 햇빛에 오롯하게 건조하는 일은 또 얼마나 정성이 깃든 일인가! 산에서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 땔감을 얻는 일은 다도의 길이 아니다. 동백나무 잔가지나 싸리나무, 그리고 굴거리나무를 선택해야 한다. 이들 나무의 특성은 연기가 많이 나지 않고 매우 뜨거운 화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차는 흡수성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차를 만들 때 연기가 많이 나는 땔감을 사용하면 좋지 않다. 다시 말해 화기가 차에 스미면 완성된 차에서 불에 그을린 냄새가 나 신선한 차를 버리게 되는 낭패를 겪게 된다. 이런 연유로 차를 덖는(물기가 조금 있는 고기나 약재, 곡식 따위를 물을 더하지 않고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서 익힌다는 말) 땔감조차도 중정中正의 도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물을 얻는 일은 얼마나 까다로운가. 세심한 정성을 쏟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차라도 그 맛의 신비함을 그르치게 된다. 그래서 차에 대한 여러 고전古典에 ‘다도는 물을 얻는 길에서 비롯’된다고 적고 있다. 지천으로 흐르는 자연의 물길, 산천의 맑은 물이라도 내성內性이 온전치 못하면 다도를 그르치게 된다. 초의선사는 ‘차는 물의 신神이요茶者水之神, 물은 차의 본체가 된다水者 茶之體.’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차는 물에 있어 신선한 주인이며, 물은 차에 있어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차라고 해도 본체인 순수한 물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차 맛을 알 수 없고, 아무리 빼어난 물이라 해도 천하의 차를 만나지 못하면 물의 본체를 들여다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 선인은 세상의 귀한 물을 얻기 위해 천금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다도의 극미, 행다行茶
천하에 으뜸가는 물을 얻어 최상의 정성으로 만든 차. 이 두 가지 요소가 마침내 화합하여 어우러진다 해도 그 차를 우려내는 차인의 정신이 맑고 의연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당나라의 수많은 문인들을 비롯하여 송나라의 시인 묵객들의 시에는 물론 고려, 조선시대의 문장가들의 시에 물 끓이는 것에 관한 시가 많이 있는 것을 보면 탕수(끓는 물)를 얻는 법도가 참 그지없이 세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을 지나치게 끓이면 탕수가 노수老水가 된다. 물이 늙어 진기眞氣를 해친다. 반대로 설 끓이면 맹탕이 되어 물에 헛기운이 쌓여 일을 그르치게 된다. 그래서 물 또한 중정의 도를 얻지 않으면 차도라 할 수 없다. 어디 이뿐인가? 차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소위 차를 내는 행다에 집중되어 있다.
다도용심茶道用心, 차의 길에 있어 마음을 얻는 일, 다도용심을 얻는 것이 바로 검덕儉德이다. 산천도인(추사 김정희의 아우)은 차의 성품이 삿되지 않고 군자의 성품을 닮아서, 지조 높은 선비가 아니면 다도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아무리 값비싼 찻그릇, 고아한 차실이 갖추어져 이목구비가 훤칠한 차인이나 미려한 여인이 우아한 솜씨로 차를 우려낸다 해도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다도는 금방 천박하게 느껴진다.
다도의 극미는 곧 행다라고 할 수 있다. 행다의 규정은 그 자체로 독립되지 않고 앞서 말한 찻잎을 수확하여 차를 만들고 불을 지펴 물을 끓이고, 차와 물을 배합하여 간을 잘 맞추고 찻잔을 배열하고, 손님을 초대하는 것에 이른다. 그날 차회의 분위기와 격조 높은 뜻을 헤아려 다식茶食을 준비하고 차를 마신 후 그것들을 설거지하는 모두가 행다로 집약된다.
옛 차인들이 지켜낸 겸손과 의연함
절대로 솜씨나 기교에 매여서는 진솔한 다도라 할 수 없다. 행다는 팽주 (행다하는 주인)의 마음이 평온해야 하며 무엇보다 집착이 없는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에 앞서 형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찻잔을 가지런히 배열하는데 찻상의 모양새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모양새에 따라서 잔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찻상의 굽이 높은데 찻잔마저 목이 길거나 우뚝 서 있으면 균형을 잃어 사람의 마음, 초대 받은 손님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반대로 찻잔을 배열하는 찻상의 굽이 낮은데 찻잔이 납작하게 엎어져 있으면 그 얼마나 볼품없겠는가? 이렇듯 사소한 것 하나라도 세심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행다를 그르치게 된다.
봄비 내리는 산사의 오후, 멀리 바다 안개가 어리는 날이나 푸른 대나무 우거진 숲 속에 언뜻언뜻 피는 동백꽃 몽우리가 보이는 날, 그 아스라한 찻자리의 행다를 상상해보라. 비취빛 가을 하늘은 맑고 투명하여 온통 우리의 가슴속으로 내려앉았을 때. 세상천지 길이 끊기고 아스라한 이승의 하늘 밖에서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깊은 겨울밤 홀로 서재에 앉아 차를 우린다고 해보자. 그 마음의 경계가 육신 속에 얽힌 삼라만상의 모든 티끌을 쓸어내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차가 나올 수 있을까?
그래서 어느 곳 어느 때, 어느 경계에 있어 행다를 진행하는 차인의 마음은 깨끗하고 청아해야 한다. 겉모양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심으로 가라앉은 청빈, 허적虛寂 그 본체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 선인, 옛 차인들은 하나같이 행다의 정신을 겸손함에 두고 있다. 겸손하면서도 덕이 넘치는 의연함이 바로 도인의 자리이고 선비의 지조가 아닐까?
텅 비어 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공적空寂, 이런 마음으로 저 송광사의 혜심국사는 달빛을 마주하고 있는 북두칠성의 물을 길러 계수나무 땔감으로 불을 지피고 허공의 차 한 잔을 마셨으리라.
올 겨울 비가 많고 따뜻한 봄 같아
길 마르기 기다려 버들가지 피는 강가 가려 했는데
갑자기 구슬 같은 싸락눈이 창문에 흩날려
어느새 은빛 바다가 내川와 언덕에 가득 차네.
찻물이 돌냄비에서 우니 시의 운율이 맑고
매화꽃은 강가 언덕에 만발하여 사립문을 가리네…
북쪽 마당 돌아보니 봄바람 세찬데
쓸쓸한 집안엔 해가 저물려 하네.
― 이색의 <설雪> 중에서
이색(李穡, 1328~1396)의 차시다. 쓸쓸한 우리 영혼의 풀밭에 만발한 매화꽃 향기가 그윽하지 아니한가! 우리 영혼 속의 차를 한 잔 마시자. 이럴 때 행다의 끝없는 자비의 서원, 겸양과 화해, 사랑의 찻자리가 된다. 이 경계를 얻기 위해 우리는 행다를 지극한 마음으로 펼친다.
글·여연스님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차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사진·문화재청, 한국차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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