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에서의 즉위장소
- 즉위식, 국왕의 탄생(김지영 등/돌베개) 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에서 왕의 즉위식은 어디에서 했을까. 왕의 즉위장소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왕위에 오르는 방식을 알 필요가 있다. 왕위에 오르는 방식은 크게 5가지이다. 첫 번째는 ‘방벌放伐’로서 혁명을 통해 새롭게 나라를 세운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선양방벌禪讓放伐’ 즉 덕을 잃고 악정을 행하는 임금은 내쳐도 거리낄 바 없다는 중국의 역성혁명관에서 기인한 것이다.(표준국어대사전)
두 번째는 ‘선양禪讓’으로서 혈연세습이 아닌 덕과 능력을 가진 자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방식은 중국에서 요堯가 혈연관계가 없는 순舜에게 왕위를 넘겨준 예처럼 동양에서 정치적 이상으로 삼았다. 조선의 건국은 외견상으로는 선양의 형식을 따랐다.
세 번째는 ‘사위嗣位’는 왕이 죽은 후 왕위를 물려받는 것으로 고명에 의한 즉위식와 책봉의식이 있게 된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일반적인 즉위 방업이었다. 네 번째는 ‘선위禪位’로서 왕이 살아 있을 동안 왕위를 물려주는 것으로서 선위는 물려받는 사람이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이이다. 다섯 번째는 ‘반정反正’으로서 왕위를 강제로 빼앗는 것이다.
중국에서 남북조시대에는 여러 나라가 난립하여 왕권의 교체가 빈번하여 선양도 ‘외선外禪’과 ‘내선內禪’으로 구분하였는데 ‘외선’은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고 ‘내선’은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여러 왕위 계승방식 중에서 조선에서는 사위가 가장 많았고 기타 선위, 반정 등이 있었다. 조선왕의 즉위식은 사위인가, 선위인가, 반정인가에 따라 위치가 달랐다. 기본적으로 사위일 경우는 정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에서 이루어졌고, 선위나 반정의 경우는 정전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즉위하는 장소가 다른 것은 왕으로서의 ‘선위’는 <길례吉禮>이고 ‘사위’는 <흉례凶禮>이므로 그 상황에 맞춰했던 것이다. (선위 장소에 대한 것은 별첨 참조) 우선 크게는 사위의 경우는 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것은 세종 때 만들어진 오례의에서 정해진 것으로 오례의에 의하면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에서 즉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세종실록 오례의 참조)
정종, 태종, 세종, 그리고 명목상의 선위인 세조 때 선위가 길례이므로 정전에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즉위식, 110쪽) 그리고 태조도 선양의 개념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고려의 정전인 수강궁에서 선양을 받았다. 반정의 경우는 선위할 왕이 없으므로 우리나라의 경우 왕실의 큰 어른인 대비의 추인을 받는 형식을 하였는데 이때도 정전에서 즉위식이 이루어졌다.
즉위식의 장소가 여러 곳인 것은 사위가 빈전(죽은 왕의 시신을 모신 곳)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궁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 등이 있었는데 왕에 따라 거처하는 곳이 달랐기 때문에 승하한 궁도 달랐다. 따라서 빈전 위치에 따라 즉위하는 곳이 달라진 것이다. 문종은 세종이 승하한 곳이 사저였기 때문에 사저에서 즉위식을 하였고 광해군은 임진란 직후라 행궁으로 사용한 월산대군 사저(현 덕수궁 자리)의 서청에서 즉위를 하였다.
그리고 별첨 표에 인종이 명정전 처마아래서 즉위하였다는 것은 글쓴이의 오해가 아닌가 생각한다. 중종실록 39년(1544년) 11월 20일 7번째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창경궁(昌慶宮)에서 즉위하여 명정전(明政殿) ‘첨하’에서 여러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종친 및 문무백관들은 모두 명정전의 동서쪽 뜰로 나아가고 통례가 태화문 밖에 나아가 나오시기를 청하였다. 시각은 이미 캄캄하여 촛불을 밝히고 나오는데 태복(太僕)이 승여(乘輿)를 올렸으나 상이 물리치고는 타지 않고 간신히 걸어서 어좌(御座)의 옆에 이르러 차마 앉지 못하고 오랫동안 국궁(鞠躬)하고 서 있었다.
승지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자리에 오르신 뒤에라야 여러 신하들이 하례를 올릴 수 있습니다. 지금 자리에 오르지 않으시니 예식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하니,
상이 이에 억지로 자리에 올라앉았으나 오히려 불안한 자세였고 너무 애통하여 눈물이 비 오듯이 떨어지자 좌우의 뜰에 있던 여러 신하들도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예식이 끝나자 상이 또 걸어서 여차에 들어가 면복(冕服)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었다.
원문 : 卽位于昌慶宮。 御明政殿簷下, 受群臣賀。 宗親及文武百官, 皆就于明政殿東西庭, 通禮詣泰和門外, 啓請出次。 時, 日已昏黑, 明燭乃出。 太僕進輿, 上却而不御, 艱難行步, 至御座之側, 不忍當尊, 良久鞠躬而立。 承旨進前而啓曰: “陞座然後, 群臣得以陳賀。 今不陞座, 難以成禮。” 上於是黽勉陞座, 而猶不安御, 哀痛之極, 泣下如瀉, 左右在庭群臣, 莫不嗚咽流涕。 禮畢, 上又步入廬次, 釋冕服反喪服。
여기서 ‘첨하簷下’에서 '簷'은 처마 '첨簷'이므로 처마 아래라는 해석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의 즉위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인종 즉위 내용을 보면 ‘첨하’에서 하례를 받은 다음 내용을 보면 명정전 ‘태화문’ 밖으로 나가 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같은 11월 20일 6번째 기사에서 보면 ‘태화문’ 밖에서 신하들이 도열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명정전 지붕아래서는 몇몇 신하들을 하례만을 받은 것이고 제대로 된 즉위식은 명정전 앞 ‘태화문’에서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여기서 태화문은 동궐도에서도 나오지 않는 이름이다. 창경궁 명정전 앞의 문은 명정문으로서 현재 모든 정전의 문이 정전 이름을 따서 붙이고 있다. 따라서 태화문은 중종이 창경궁을 창건하고 1592년에 소실되기 전 있었던 어느 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정확한 위치는 추후 자료를 찾아 보완하기로 한다.
별첨 : 조선국왕의 즉위 공간(출처: 즉위식, 국왕의 탄생/306쪽)
도시 | 궁궐 | 즉위공간 | 즉위왕 | 비고 (인원) | |
개경 | 수창궁 | 강안전* | 태조(개국), 태종(선) | 2 | 2 |
한양 | 경복궁 | 근정전 | 정종(선), 세종(선), 세조(선), 중종(반) | 4 | 9 |
근정문 | 단종(사),성종(사), 명종(사), 선조(사), 경종(사) | 5 | 8 | ||
창덕궁 | 인정전(처마) | 연산군(사) | 1 | ||
인정문 | 효종(사), 현종(사), 숙종(사), 영조(사), 순조(사), 철종(사), 고종(사) | 7 | |||
창경궁 | 태화문** | 인종(사) | 1 | 2 | |
수강궁 중문 | 예종(선) | 1 | |||
경희궁 | 숭정문 | 정조(사), 헌종(사) | 2 | 2 | |
경운궁 | 행궁서청 | 광해군(사) | 1 | 4 | |
즉조당 | 인조(반) | 1 | |||
태극전 | 고종황제(개국) | 1 | |||
돈덕전 | 순종황제(선) | 1 | |||
기타 | 영릉대군사저 | 문종(사) | 1 | 1 | |
계 | 28 |
주 1) 등극방식에서 (선)은 선위, (사)는 사위, (반)은 반정임
주 2) 창경궁은 수강궁자리에 지은 것으로 처음 광연정廣延亭이 있던 자리에 수강궁을 지었고, 태조(1408년)와 세조(1468년) 승하한 곳이다. 이후 성종 때 창경궁이 건설되었다.(조선왕조의 궁궐건축과 정치/237쪽)
주 3) 연산군이 인정전(처마)에서 즉위했다는 기록은 연산 즉위년(1494년) 12월 29일 4번째 기사에도 나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근시가 대보를 받들고 앞서고 종친 문무백관이 차례로 나갔다. 왕(王)이 인정전(仁政殿) 처마 밑에 자리 잡고 의례대로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고서, 여차(廬次)로 돌아가서 면복(冕服)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이 맞는 것인지는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세종때 만들어진 오례의에 의하면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세종 이후 사위를 한 문종, 단종, 예종, 중종이 정전의 문에서 즉위하였고, 사위의 경우 정전의 문에서 즉위하는 것이 조선 내내 이어져 왔으므로 연산군도 그에 준하는 예법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였을 것이 아닌가 한다.
* <즉위식, 국왕의 탄생>에는 태조와 태종이 즉위한 곳을 ‘강안전(터)’라고 하였는데 본인이 실록을 검토한 결과 ‘강안전’이 맞는다는 판단에서 ‘강안전’이라고 고쳤다. 태조의 즉위에 대한 내용에 대해 태조실록 1년 7월 17일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기둥 안[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
실록에는 태조나 태종의 즉위 때 수창궁에서 했다고 하였고 특히 태조의 경우 강안전이라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전殿’에 들어갔다고 하므로 건물은 ‘강안전’일 수밖에 없다. 태종은 정종 2년 11월 13일 즉위하였는데 이후 정종 2년(1400년) 12월 22일 수창궁이 소실되었다. 이후 강안전이 기록에 나오는 것은 태종 1년 1월 1일 기사에서 ‘강안전터’에서 하례를 하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수창궁이 불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태조나 태종은 수창궁이 소실되기 전 즉위하였으므로 ‘강안전’에서 즉위한 것이 맞는 것이라 생각한다.
** 원래 ‘명정전(처마)’로 되어 있던 것은 앞 설명에 의거 ‘태화문’으로 수정하였음
참고문헌
즉위식, 국왕의 탄생/김지영 외/돌베개/2013
동궐/고려대박물관, 동아대박물관/2012
조선왕조의 궁궐건축과 정치/이강근/
조선왕조실록 사이트/http://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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