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 여고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다. “(가임 적령기인) 30대 초반 여자 인구가 제일 적다며?” “당연하지! 그렇게 여아 낙태를 해댔으니, 여자들이 남아났겠냐.” 이렇게 똑똑한 여성들이 앞으로 한국 사회를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현재 인권 관련 국제기구들은 한국의 심각한 여성 인권 문제를 아내에 대한 폭력(가정폭력)과 성형 시술로 보고 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분야에서 한국의 ‘상징’은 여아 낙태였다. 한국의 태아 성 감별 의료 기술은 세계적 수준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여아를 원하는 부모들이 성 감별을 통해 남아를 낙태시키기도 한다. 임신 중단 합법화, 즉 기존의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낙태죄 폐지는 너무 당연하다. 찬반 논의는 사회적 역량 낭비다. 낙태죄는 오래전부터 사문화(死文化)된 법이다. 낙태죄 폐지 주장이 제기되자 “낙태가 불법이었어?”라고 되묻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만연한 현상이다.
법적 구속력이 전혀 없는, 있으나 마나한 법이 불법으로 규정함으로써 국민(여성)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해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일부 남성들은 단지 여성을 괴롭히기 위해 낙태가 불법이라는 사실을 이용한다. 이혼 소송 중인 남성, 상대방의 임신 사실도 몰랐던 남성, 양육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남성들이 여성을 임신 중절로 고소하는 경우다.
가장 의아한 점은 왜 이 논의가 여성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대립으로 전개되는가이다. 여성들의 주장대로 “내 몸이 바로 생명이다”. 이토록 간단한 진실이 있을까.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짓밟은 이들이 진정 누구였는가. 1970년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 사업(강제 낙태)이 대표적이다.
생명은 평등하지 않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장애 여성, 10대 여성의 임신과 그들의 생명은 사회가 ‘반기지 않는다’. 생명을 그토록 존중하는 나라가 1956년부터 1998년까지 해외 입양 부동의 1위국이었단 말인가(지금은 중국이다). ‘여성의 선택권’ 역시 그다지 억압받은 적이 ‘없다’. 여아 낙태는 가부장제 사회의 강요에 의한 것이든 여성들의 주체적 행위성(동의)이든, 여성들은 이미 충분히 ‘선택’해 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성비(性比·여아 100명당 남아의 숫자)는 100 대 105 정도가 정상이다. 그러나 대구·경북 지역의 경우 셋째 자녀의 성비가 100 대 140을 육박하는 시기도 있었다. ‘여아 학살’로 인한 성비 불균형은 “초등학교 남학생들에게 여자 짝꿍이 없다”는 또 다른 남아 걱정으로 이어졌다. 대책(남아 선호 문화의 폐지) 마련을 문제의 원인(다시 남아 위주)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낙태가 범죄(crime)든 죄(sin)든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사회가 정한다. 죄라고 해도, 성관계에 참여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책임이다. 사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사회적’ 성역할이지 ‘신체적’ 능력에 의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
낙태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가장 염려해야 하는 사항은, 낙태는 여성의 선택권이나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관계 시 남성의 권력과 무책임으로 인한 사후 피임, 즉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콘돔은 인류의 발명품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이었다. 인구 조절이 가능해졌고 여성은 임신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 시대 여성들은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평생을 임신, 출산, 육아로 보냈다. 근대 이전에는 전쟁 시 사망한 사람보다 출산 도중에 목숨을 잃은 여성이 더 많았다.
피임 방법 중 여성이 매일 복용해야 하는 경구 피임약이나 자궁 내 장치보다 남성의 콘돔 사용이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대개 남성들은 콘돔 사용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성별 권력 관계는 피임의 책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성이 남성에게 콘돔 사용을 강제할 협상력이 없고, 콘돔 사용을 “장화 신고 달리기”라며 억울해하는 남성 문화에다, 피임은 여성의 책임이라는 의식이 당연시되는 사회. 여성은 낙태라는 폭력의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낙태죄 폐지는 폭력의 후유증을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절실한 요구일 뿐이다. 남성의 ‘귀찮음’이 여성의 생명권을 침해한다. 낙태죄 존속과 폐지 주장 이전에,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과제는 남성의 인식 교정이다. 성관계는 쾌락, 의무, 교환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모든 전제는, 출산을 원치 않는다면, 피임이다. 피임을 성관계의 일부로 규범화해야 한다.
미국의 여성학자 주디스 앨런은 남성들이 낙태를 왜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하는지 궁금했다. 연구 결과, 남성들은 그릇으로서 여성의 몸(자궁)과 그 그릇에 담긴 것은 모두 ‘내 것’인데 낙태는 주인의 허락 없이 그릇을 비우는 “도둑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농구나 축구에 비유하면, 골이 들어갔는데 여성과 의사가 그물 밖으로 공을 빼는 행위에 대한 분노라는 것이다. 미국 남성에 비하면, 낙태에 관심조차 없는 한국 남성은 그래도 나은 사람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