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3월7일 새벽. 종로의 파고다극장에서 기형도 시인이 숨졌다. 사인은 뇌졸중. 스물아홉의 젊은 나이였다. 첫 시집을 내기도 전에 그의 죽음이 우리 곁에 먼저 도착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은 그 후 30년 동안 ‘청춘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며 문학청년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지금까지 86쇄를 찍고 30만부 이상 판매됐다.
기형도가 살았던 세월보다 죽은 후의 시간이 더 길지만, 기형도의 시는 아직도 뜨겁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빈 집’), “사랑을 목발질하며 나는 살아왔구나”(‘쥐불놀이’)와 같은 시의 구절들은 아직도 자주 인용된다.
기형도 30주기를 맞아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젊은 시인 88인은 기형도 트리뷰트 시집 <어느 푸른 저녁>(문학과지성사)을 펴낸다. 아이돌 그룹 아스트로는 패션잡지 보그와 기형도의 ‘어느 푸른 저녁’을 모티프로 화보 촬영을 하고 멤버들이 시 구절을 녹음한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기형도 시의 매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도심의 심야극장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시인의 개인적 신화를 문화적 사건으로 만들어버린 대중들의 지속적 열광”이 기형도 신화를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기형도 30주기를 맞아 오는 7일 열리는 ‘낭독의 밤’ 행사에서 낭독을 맡은 1960년대생 변영주 영화감독(53), 1970년대생 심보선 시인(49), 트리뷰트 시집에 헌정시를 쓴 1980년대생 오은 시인(37), 1990년대생 문보영 시인(27)에게 물었다. ①기형도의 시를 처음 읽게 된 계기 ②기형도 시가 사랑받는 이유 ③가장 좋아하는 기형도의 시에 대해서.
■ 변영주 영화감독
①대학 시절 서점에서 신간으로 사봤던 것 같다.
②기형도의 시가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는 훌륭한 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이유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기형도의 시는 즐겨 읽는다. 기형도는 20세기에 시집을 낸 21세기의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모던한 글을 쓰는데, 굉장히 현실 속에 천착해 있다. 구세대 작가들은 대부분 비루함을 즐기고, 자신이 비루하고 못난 이유가 가족이나 주변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기형도는 자신이 비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훌륭하다.
③‘쥐불놀이’다. 그리고 ‘쥐불놀이’ 다음엔 반드시 ‘빈 집’을 읽어야 한다. 이번 낭독의 밤에선 ‘쥐불놀이’를 읽을 예정이다. ‘쥐불놀이’는 절절하면서도 스스로 열심히 살겠다고 결심하는 듯한 느낌의 시여서 좋아한다.
■ 심보선 시인
①기형도 시집이 사실상 시집에 대한 첫 경험이다. 대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 빌려 읽었는데, 반복해서 읽고 또 읽은 첫 시집이었다. 기형도 시는 나에게 혼자 생각에 잠기고, 내면에 깊이 들어가고 싶을 때 찾는 시집이다. 동시에 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보편적 울림이 있는 것 같다.
②기형도의 시는 암울한 시대적·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깔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일상, 청년의 삶이나 감정을 잘 형상화한 것 같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나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는데, 명작이란 의미의 고전이 아니라 청년들이 자기의 삶과 연결시키며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고전’이다.
③‘포도밭 묘지2’를 낭독할 거다.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통찰 같은 것이 담겨있다.
■ 오은 시인
①2002년 수능문제 보기에서 기형도의 시를 처음 만났다. ‘엄마 걱정’이란 시가 나왔는데, 정답이었다. 이후 대학교에서 선배가 추천해줘서 다시 만났다.
②20대가 느낄 수 있는 청춘의 고독과 막막함이 잘 담겨있는 것 같다. 윤동주 같은 경우 부끄러움이 키워드라면 기형도만의 고독과 우울함, 조숙한 아이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같은 게 느껴졌다. 기형도의 기본 정조는 쓸쓸함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 지방에서 서울에 와서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고독이 있다. 쓸쓸함과 고독, 비인간적 면모들이 21세기에도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기형도가 뼈아프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③트리뷰트 시집엔 기형도의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란 시를 모티프로 썼다. 기형도가 2층 건물에서 누가 울던 모습을 지켜보다 나중에 신문사 기자가 돼 사무실에서 떠올리는 장면을 쓴 시다. 시를 쓸 때 남들이 지나치고 마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걸 보여준 시인인 것 같다. 풍경 하나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시인이다.
■ 문보영 시인
①과외받는 학생에게 기형도 시를 소개받았다. 대학생 때 과외를 가르치다 모의고사 지문에서 기형도의 ‘빈 집’을 처음 봤는데, 과외받는 학생이 기형도 시를 좋아해 시집을 갖고 있더라. 나도 시집을 사서 읽었다.
②기형도 시의 생명력은 현실과 유리되지 않으면서도 감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갖고 있는 데 있지 않을까. 쓸쓸함과 권태, 그 두 가지 정서는 누구나 갖고 있지 않나. 기형도 시를 안 읽은 시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필독서’처럼 누구나 기형도 앓이를 한 번쯤 하는 시기를 거치는 것 같다.
③‘장미빛 인생’ ‘나무공’ ‘늙은 사람’ 같은 시를 좋아한다. 그동안 봤던 시들은 독백체의 자기 얘기를 하는 시들이 많았는데, 기형도 시는 소설 같았다. 화자가 관찰자로 다른 대상을 관찰하는 시도 많고, 희곡적 요소도 많고. 자아에 함몰된 시가 아니라 타인을 많이 초대하는 시였다.
기형도 시인의 30주기인 7일엔 시인을 추억하고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연세대학교에서 ‘신화에서 역사로-기형도 시의 새로운 읽기’라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려 정명교 연세대 교수, 유성호 고려대 교수 등이 참석해 기형도 시를 새롭게 조명한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다리 소극장’에선 낭독의 밤 ‘어느 푸른 저녁’이 열려 시 낭독과 창작극, 음악 공연 등의 행사가 열린다. 문학과지성사는 기형도 시인의 미발표 시 97편 전편을 수록한 전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을 새로 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