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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켜켜이 쌓인 ‘전쟁과 평화’의 역사…화산지대를 걷다-연천

깜보입니다 2020. 10. 15. 11:02

가늠할 수 없는 억겁의 시간이 빚어낸 ‘한탄강 세계지질공원’

호로고루는 화산 활동의 결과로 생성된 용암대지 위에 만든 고구려성이다. 이후 신라가 동벽에 다시 돌을 쌓았다. 고구려 장인들에게 익숙했던 현무암과 신라 장인에게 편했던 편마암이 지층을 이루듯 중첩됐다. 성 남쪽과 북쪽은 자연 상태의 현무암 절벽을 그대로 이용했다. 삼국의 역사와 지질의 역사를 공부하고, 드넓은 하늘과 땅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지난 7월 세계지질공원으로 선정된 한탄강 일대의 취재 계획을 세웠다가 연기했다. 수해 때다. 8월6일 지질 명소로 꼽히던 연천군 고문리 18m 높이의 재인폭포는 침수됐다.

 

               ■암석 윤회

용암이 차가운 물과 만나 빠르게 식을 때 그 표면이 둥근 베개모양으로 굳어진 베개용암은 주로 바다에서 생성된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천연기념물 제542호다) 지역은 내륙 강가라 희귀하다.

 

50만~130만년 전 화산 폭발 추정
협곡·용암지대로 천연 절경 뽐내

지난달 24일 이곳을 찾았을 때 한탄강 범람 여파가 뚜렷하게 있었다. 주상절리(柱狀節理)와 주변 나뭇잎엔 잿빛 토사가 얇은 층을 이루듯 쌓였다. 이 또한 풍화나 침식 같은 암석 윤회(輪廻)의 과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회라는 말이 불교에 지구, 지리에서도 쓰인다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한탄강 세계지질공원 개요는 다음과 같다. 공공기관 자료를 요약했다.

‘북한의 강원 평강군 오리산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용암이 한탄강 물길을 메우며 철원, 포천, 연천, 파주까지 흘렀다. 식은 용암에 생긴 틈으로 3~8각 기둥(柱狀)이 굳어졌다. 비와 강물이 틈(節理)으로 스며들고 흐르며, 얼고 녹기를 반복했다. 침식과 풍화로 암석이 깎이면서 다시 절리를 따라 바위가 하나둘 떨어져 나가며 다른 돌기둥이 솟아났다. 그렇게 지금의 현무암 협곡이 만들어졌다.’

화산 폭발은 신생대 제4기 홍적세 시기다. 50만~130만년 전(추정)이다. 추정 간극만 80만년.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지질 활동의 결과가 지금 지형을 이뤘다. 한탄강 공원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한국 육지에선 주상절리가 형성된 유일한 곳이다. 한국 주상절리는 제주나 경상도 해안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한탄강 일대 지형은 협곡과 용암지대로 이뤄졌는데, 명소 곳곳은 또 특색이 있다. 고문리 백의리층은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 아래 둥근 자갈과 모래가 쌓였다. 상층 현무암에선 판상절리(板狀節理)와 주상절리 모두 볼 수 있다. 전곡읍 신답리 아우라지 베개용암은 용암과 차가운 물이 빠르게 만나 식으면서 그 표면이 둥근 베개 모양으로 굳어 생긴 것이다. 60m 높이의 신답리 좌상바위 역사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중생대 백악기 말 화산활동으로 생겼다. 화산 화구나 화도 주변에서 마그마가 분출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경관은 지질에 관한 생각을 떨쳐버리게 한다. 조선시대 한탄강 일대는 말년을 수려한 자연경관을 즐기며 살려던 선비들이 찾아온 곳이다. 금강산 가던 여러 유람객의 시선을 붙들었다. 조선 후기 화가인 정선이 금강산 당도 전 한탄강 여러 지질 명소를 그렸다.

‘역사 설명’ 문화해설사 동행하는
내년 봄 ‘카약 투어’ 체험 주목

“경치 보고 맛집 이동하는 곳보다
‘나를 돌아보는 여행지’로 적격”

연천군은 이 경관과 지질을 결합한 지오투어리즘(geotourism) 상품을 개발 중이다. 그중 하나가 카약 투어다. 24일 카약을 타고 좌상바위에서 신답리를 끼고 도는 물길(5㎞)을 따라갔다. 물에선 주상절리가 달리 보인다. 억겁의 시간, 원초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년 봄 정식 체험상품으로 내놓는다. 시범 카약 무료 체험은 예약이 이미 찼다. 유원지 카약 투어와 다른 점은 문화해설사가 동행하며 지질 역사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곳을 제대로 ‘여행’하려면, 조금 더 능동적인 사유가 필요할지 모른다. 윤미숙 연천군 관광과 지질생태팀장은 “(연천과 한탄강 일대는) 경치 좋은 데 보고 맛집으로 바로 이동하는 곳이라기보단, 인류의 발자취나 지구의 과거와 현재를 곰곰이 들여다보는 곳이다. 기후변화나 코로나19 같은 재난이 닥친 시대에 지구를, 또 나를 돌아보는 여행지”라고 말했다.

■이야기 속으로

주상절리니 기암괴석이니 지질의 작용이 만들어낸 명소엔 어디든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연천군이 최고 명소로 꼽은 재인폭포에도 두 가지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조선시대 포천 원님이 줄타기 재인(才人)에게 폭포 위에서 재주를 부리게 한 뒤 줄을 끊어 죽였다. 부인을 성폭행하려던 순간 그 부인이 원님 코를 물은 뒤 자결했다는 게 골자다. ‘코문이’가 산다 해서 ‘코문리’라고 부르다 고문리가 되었고, 폭포 이름도 ‘재인폭포’라 했다. ‘여인의 순결이 포말 되어.’ 1990년대 재인폭포를 소개하는 여행기의 제목이었다. 폭력을 단죄하기보단, 순결을 강조하고 정절을 기리는 시대착오는 조선시대에서 현대로 이어진 셈이다.

또 하나의 설화는 한 재인이 외줄로 능히 걸을 수 있다며 마을 사람과 내기를 했는데, 재인이 평지를 걷듯 하자 마을 사람이 줄을 끊어 죽였다는 것이다. 재인이 내기로 건 게 아내다. 이런 폭력과 대상화도 조선시대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게 지금 시대다.

전곡읍 신답리 60m 높이의 ‘좌상바위’는 궁평리 마을 왼쪽의 커다란 형상이라는 뜻이다. 마을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또 다른 이름은 ‘자살바위’다. 한국전쟁 때 국군이나 인민군이 전쟁의 고통 때문에 이곳에 올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역사의 지층

                                                           호로고루 초입 ‘통일바라기’ 비석.

 

삼국시대 흔적 간직 ‘호로고루’엔
한국전 아픔까지 고스란히 품어

경기 연천과 포천, 강원 철원을 아우르는 한탄강 일대는 비무장지대(DMZ) 접경지다. 전쟁 때 대부분 격전지다. 주상절리와 용암대지 위에서 죽고 죽이려는 일들이 숱하게 벌어졌다. 한탄강(漢灘江)의 한은 ‘클 한(漢)’과 ‘여울 탄(灘)’으로 ‘큰 여울이 있는 강’을 뜻하지만, 한탄(恨歎)의 감정이 들어가 호명되기도 했다. 이곳은 삼국시대에도 격전지였다.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에는 임진강 일대 지질 명소도 들어간다. 임진강 남쪽 당포성도 현무암 주상절리와 인공물을 합한 성이다. 고구려 때 축조했다. 신라가 이후 성벽을 쌓아 계속 사용했다. 이곳에선 고구려 기와와 신라 기와가 출토됐다.

삼국의 역사가 또렷하게 묻힌 곳은 호로고루다. 삼국시대 임진강은 호로하로 불렸다. 고구려가 임진강 등지에 방어선을 쳤다. 호로고루도 그중 하나다. 성의 남쪽과 북쪽은 자연 상태의 현무암 절벽을 성벽으로 사용했다. 동벽은 용암대지 위 평지에 세웠다. 높이 10m, 90m 성곽에 들어간 흙과 돌의 양은 1만8996㎥다. 고구려 멸망 뒤 이곳을 점령한 신라군은 동벽에 다시 성벽을 쌓는다. 동벽 남쪽 치(雉·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앞으로 내어 쌓은 구조물)엔 편마암을 쌓았다. 임진강 일대를 오래 점령한 고구려는 주변에 가장 흔한 현무암을 수월하게 다뤘지만, 신라는 이 암석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이 뱀을 잡으려고 중장비로 남쪽 치의 상부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현무암과 신라의 편마암이 드러났다. 횡으로 난 퇴적의 지층엔 삼국의 역사가 중첩된 것이다. 지질의 역사에 포개진 게 전쟁의 역사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이 호로고루에 포대를 설치했다.

호로고루엔 해바라기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곳 주민들은 2016년 8월12일 비석을 세우며 ‘통일바라기’라는 이름을 새겼다. 멀지 않은 곳에 광개토대왕비를 본뜬 모형이 설치됐다. 북한이 2002년 실물 모형을 만들어 보낸 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경계에 놓인 듯했다. 당포성 부근 도로엔 콘크리트 대전차방호벽이 들어섰다. 연천군은 이 벽에 고구려 벽화를 재현하려 한다. 또 다른 ‘필요’도 있다고 했으나, 그 필요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군사 목적인 듯했다. 여행 목적지 한 곳은 군사훈련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목적지를 향하던 길에서 전차 부대가 훈련을 진행했다. 연천군은 군사와 안보 대신 지질과 생태 이미지를 세우려 하는데, 그 인식 제고를 위한 일이 쉬워 보이진 않았다.

 

         ■천고마비

전곡 선사박물관은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된 곳에 들어섰다. 태블릿PC를 연계해 지질과 인류 역사를 설명하는 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연천군 초청으로 방문한 지난달 24~25일 돋보인 것은 하늘과 땅이다. 호로고루와 당포성, 은대리성은 너른 잔디밭과 숲을 뒀다.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된 전곡리 유적도 인류 역사의 지층을 이룬 곳인데, 경관도 뛰어나다. 드넓은 잔디밭과 빽빽한 숲과 고즈넉한 산책로는 언택트(비대면) 여행지로 적격이다. 용암대지는 맑고 두꺼운 구름과 만나 넓은 지평선을 만들었다. 퇴적도 침식도 없는 하늘은 지금이나 지금의 연천을 만든 홍적세 시기나 비슷할 듯했다. 연천의 하늘은 ‘천고마비’의 계절에 더 없이 어울릴 듯하다.

 

공원화 사업을 마친 재인폭포는 14일 재개장했다. 토사를 다 벗겨냈다. 31일까지 국화 전시 행사가 열린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의 주상절리에는 붉은 단풍이 기둥과 틈을 타고 내려온다. 10월 말과 11월 초가 단풍 제철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142036005&code=350101#csidx1a9db703a0dcd9ab6988a89b6bd814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