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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한겨레 프리즘] 내 생애 가장 조용했던 공연 / 서정민

깜보입니다 2021. 4. 18. 19:01

[한겨레 프리즘] 내 생애 가장 조용했던 공연 / 서정민

서정민 입력 2021. 04. 18. 18:26 수정 2021. 04. 18. 18:46 댓글 0

 

그는 앙코르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매일 일과 사람에 치여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이 공연만을 바라보며 버텼다"고 예매 사이트에 기대평을 남긴 아이디 '김혜즈'님이 가장 듣고 싶어 한 노래다.

직전까지 '대중음악공연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로 모였던 이들이 협회를 만들고 목소리를 내는 건 대중음악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해서다.

그럼에도 더 확실한 안전을 위해 규제해야 한다면, 모두에 동일한 기준을 둬야 공연을 하는 쪽이든 보는 쪽이든 납득할 수 있다.

 

[한겨레 프리즘]

서정민 ㅣ 문화팀장

그는 앙코르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스테이’. “매일 일과 사람에 치여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이 공연만을 바라보며 버텼다”고 예매 사이트에 기대평을 남긴 아이디 ‘김혜즈’님이 가장 듣고 싶어 한 노래다. 지난해 3월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생각을 정리하러 혼자 제주로 떠난 아이디 ‘24oz’님은 “그때 처음 이 노래를 듣고 치유의 감정을 느꼈다. 그 힘으로 2020년을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케이티앤지(KT&G) 상상마당 라이브홀을 찾은 관객들은 허공에 날리는 음표 하나하나를 가슴에 눌러 담았다. 무대에 선 이는 사비나앤드론즈. 싱어송라이터 최민영의 1인 프로젝트 밴드다. 최민영은 10년 넘게 간호사로 일해왔다. 응급실과 병동에서 3교대로 근무하면서 음악 활동을 병행했다. 병원에선 간호사로서, 바깥에선 음악가로서 사람들을 치유해온 셈이다.

이날만큼 조용한 공연을 본 적이 없다. 스탠딩으로 300명 넘게 들어가는 공연장에는 60여명만이 거리두기를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 마스크를 쓴 채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공연 주최 쪽은 관객들에게 스케치북과 매직펜을 나눠줬다. “오늘 잘 보이려고 드레스를 입어봤는데, 어떤가요?” 사비나앤드론즈가 묻자 관객들은 “너무 예뻐요” “딱 좋아 보여요” 같은 글귀를 써서 들어 보였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쳤지만, 함성은 지르지 않았다. 그래도 감흥은 어디 가지 않았다.

무려 2년 만의 공연이었다. 사비나앤드론즈는 ‘질병에 대처하는 간호사로서 코로나19가 종결되지 않은 이 시점에 굳이 공연을 해야만 할까?’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고 했다. “저는 생계를 위한 직업이 있지만, 공연과 음악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분들에겐 지난 한해가 너무나 힘든 해였다는 걸 알고 있어요. 또 지치고 힘들어 위로받아야 할 마음들은 언제나 있다는 것도요. 이렇게라도 관객을 만나고 공연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8일 한국대중음악공연산업협회가 출범했다. 직전까지 ‘대중음악공연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로 모였던 이들이 협회를 만들고 목소리를 내는 건 대중음악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해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현행 사회적 거리두기(수도권 2단계, 비수도권 1.5단계) 지침에 따라 100명 이상 대중음악 공연은 금지하고 있다. 설명회, 공청회, 집회 등과 같은 행사로 분류해서다. 반면 뮤지컬, 클래식 등 공연은 규모 제한이 없다. 이에 따라 같은 공연장에서 뮤지컬 <위키드>는 되고, 가수 이소라 콘서트는 안 되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영화관도 공연장도 코로나19 감염 사례는 아직 없다. 확진자가 다녀가도 전파되진 않았다. 마스크 쓰고 대화 없이 앞만 보기 때문이다. 마주 앉아서 마스크 벗고 떠들며 밥이나 술을 먹는 자리보다 안전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더 확실한 안전을 위해 규제해야 한다면, 모두에 동일한 기준을 둬야 공연을 하는 쪽이든 보는 쪽이든 납득할 수 있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사상이 불순하다’ ‘저속하고 퇴폐적이다’ 같은 황당한 이유로 수많은 노래들을 금지곡에 가뒀다. 대중음악을 ‘딴따라의 천박한 음악’으로 찍어 누른 이면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이유로 옥죄는 건 아닐 테지만, 은연중에 ‘대중음악은 자제력이 없고 멋대로일 것’이라는 편견이 작용하고 있진 않을까?

과거 소수의 특권계층이 향유하던 클래식 음악도 이젠 누구나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대중음악만큼 서민들의 애환과 아픔을 어루만져준 음악이 또 없다. 근거 없는 두려움과 편견은 던져버리고, 노래가 가진 위로와 치유의 힘에 기대보면 어떨까? 사비나앤드론즈는 ‘어른이 되면’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아주 꼭 끌어안고/ 괜찮아질 거라 말해줘/ 그렇게 살아가 사비나” 우리, 그렇게 살아가면 안 될까?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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