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하늘이 감춘 땅] 비룡산 도솔암

깜보입니다 2008. 1. 23. 18:45
하늘이 감춘 땅] 비룡산 도솔암

자취 감춘 선사들의 도량…3대 이은 목숨 건 정진
시·공 사라진 하늘끝에 눈서리 버틴 도라지 향만

 

 지난 15일 경북 봉화군 소천면 고선리 태백산 줄기인 비룡산 홍제골로 들어섰습니다. 도솔암 가는 길입니다. 예부터 선승들은 금강산 마하연,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참선과 기도를 같이 할 수 있는 3대 도량의 하나로 태백산 도솔암을 들었습니다.
 도솔암은 이 세 암자 중에서도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으로 첫 손에 꼽혔습니다. 태백산을 손바닥 들여다보는 약초꾼이나 그 곳에서 앞서 정진했던 스님의 안내가 없이는 인적의 접근을 불허하는 곳입니다.
 


 도솔암에 가려면 먼저 모찰과 같은 홍제사를 거쳐야 합니다. 홍제사와 도솔암 모두 원효대사가 터를 잡았고, 조선시대 때는 사명대사가 수행했던 고찰입니다.
 하늘은 도솔암의 문을 쉽게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눈 쌓인 홍제골 초입부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홍제사까지 고개를 오르기 직전 응달진 골짜기에서 손을 호호 불며 차 바퀴에 체인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언덕을 올라채려는 순간 불과 몇 초 만에 “두둑, 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체인이 끊겨나가고 헛바퀴가 굴렀습니다. 잘못 후진했다간 깊은 계곡에 처박힐 수 있어서 차를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산은 일찍 해가 지기 때문에 거기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차를 그대로 둔 채 길을 재촉해 홍제사에 올라갔습니다.

참선-기도 3대 도량…등산로 없고 오솔길조차 눈 덮여

 

외진 홍제골에 있는 홍제사는 일반 불자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 후미진 산골에서 주지 범종 스님은 이번 동안거 d8.jpg때 세 명의 선승들의 참선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후미진 곳까지 다니려면 차가 없이는 곤란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인데, 범종 스님은 함께 사는 대중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타고 다니던 차까지 팔아야 했습니다. 그런 어려운 처지에서도 범종 스님은 홍제사 위 도솔암과 백련암에서 홀로 수행 중인 선승들의 뒷바라지까지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그 범종 스님, 그리고 스님의 수호신장이나 다름없는 진돗개 해탈이가 앞장 섰습니다. 또 이 인근 청옥산 정상에서 한겨울 목숨을 걸고 생식을 하며 수행 정진한 바 있는 서울 봉은사 선감 성묵 스님이 함께 길을 열었습니다. 대구에서 겨울방학을 맞아 절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 고2 성진이도 도솔암 스님에게 전달할 쌀과 반찬을 지게에 지고 뒤따랐습니다.

 방한복을 입고 미끄러지지않는 아이젠과 등산화에 눈이 들어오지 않도록 스피치까지 둘러차고 겨울 등반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도솔암 가는 길은 워낙 험준해 오르기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국내 어느 산이고 등산로가 없는 곳이 없을 지경이지만, 이곳은 아무런 등산로도 없었습니다. 눈이 쌓이지 않은 계절에도 어느 부부가 홍제사에서 도솔암에 오르려다가 세번이나 길을 찾지 못하다 네번째에야 천신만고 끝에 도솔암에 갔을 정도로 찾기가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니 오솔길마저 눈에 덮여 버린 겨울엔 더욱 만만치 않은 노정입니다.
  아니나다를까. 출발한 지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영상카메라를 멘 박종찬 기자가 디딘 얼음이 깨져 계곡에 빠지는 바람에 등산화가 흠뻑 젖고 말았습니다. 박 기자는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며 그대로 산행을 강행했습니다. 일행들이 눈 싸인 고갯길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를 수차례. 평소 한 시간에 당도할 길은 두 시간을 훌쩍 넘겼습니다.


숨찬 가슴이 막바지 고개 올라채는 순간 앞이 ‘확’

 선승은 무엇 때문에 전기도 전화도 없는 이 높고 춥고 외로운 외딴 암자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일까.
 이런 의문과 가쁜 숨이 가슴을 옥죄어올 때쯤 멀리서 도솔암 해우소(解憂所·‘근심을 해소하는 곳’이라는 뜻·화장실) 한 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과연 저곳에 오르면 ‘근심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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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 숨찬 가슴이 막바지 고개를 올라채는 순간 앞이 확 뚫리면서 갑자기 막힌 시야가 열렸습니다. 지금까지 올라온 골짜기와 달리 도솔암에선 시야가 툭 트였고, 천하의 산이 눈 아래 도열해 있었습니다. 도솔암은 마당 한 뼘 없었고, 마루 밑은 위태위태한 벼랑이었습니다. 
 도솔암 마루에선 한 스님이 산에서 캐온 도라지를 칼로 다듬고 있었습니다. 인묵 스님이었습니다.

 

일타도 혜국도 손가락 태워 공양…솔잎 생쌀 생식하며 ‘장자불와’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은둔의 선사들만이 정진했던 도솔암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타 스님(1929~99)이 머문 이후였습니다. 일타는 친가 외가 등 일가친척 49명이 차례로 출가해 석가모니 이후 가장 많은 출가자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14살에 출가한 분입니다.
 일타는 1954년 스물다섯 살에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매일 3천배씩 일주일간 용맹 정진한 뒤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기름을 먹여 열두 마디를 불에 태웠습니다. ‘생명을 다 바치더라도 반드시 깨우쳐 모든 번뇌를 여의리라’는 서원으로 단행한 연지 공양이었습니다. 그의 손이 다 타고 뼈만 남았을 때 맑은 하늘엔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일타는 그 길로 이곳 도솔암에 올라와 목숨을 건 정진 끝에 1년만에 오도송(깨달음의 시)을 불렀습니다.

 ‘頓忘一夜過(돈망일야과) 時空何所有(시공하소유) 開門花笑來(개문화소래) 光明滿天地(광명만천지)’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내니/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가버렸나/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 구나) *몰록은 찰나간 또는 무시간을 나타내는 선가의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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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꼬박 5년을 더 이곳에서 정진하며 보림(깨달음을 확고히 함)을 했습니다.
 일타의 도솔암 수행을 이어간 이는 일타의 상좌 혜국 스님(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이었습니다. 혜국은 일타가 자신의 스승인 고경 스님(1883~1946)의 후신으로 여기는 이였습니다. 고경은 조선 제일의 강사였지만 알음알이가 아니라 본성품을 제대로 보기 위해 다음 생엔 ‘바다 건너’(제주)에서 태어나 참선만 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고경이 열반한 지 딱 1년째 되는 같은 달 같은 날에 혜국이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열세 살에 일타에게 출가했기에 일타는 스승이 다시 태어나 자신에게 온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 혜국도 매일 5천배씩 올리는 21일 기도를 두 번한 뒤 해인사 장경각에서 오른손 네 손가락을 불사른 뒤 타고 남은 뼈를 잘라내고 도솔암에 올라 2년 7개월 동안 솔잎과 생쌀과 콩으로 생식을 하고 장좌불와(온종일 자지 않고 눕지도 않는 수행)를 하며 목숨을 건 정진을 했습니다.




“앉은 채 그대로 이틀 굶었더니 감기도 줄행랑”

 지금 도솔암을 홀로 지키는 인묵 스님은 그 혜국의 상좌입니다. 3대를 내려오는 도솔암에서의 정진인 셈입니다. 출가 후 20여년 동안 봉암사와 대승사 묘적암, 각화사 동암, 조계산 토굴 등 전국의 은둔처에서 정진해온 그는 출가 뒤 처음으로 서울 북한산 화계사에서 몇 달간 서울살이를 하며 불자들에게 천수경을 가르치던 중 발심해 다시 바랑 하나 메고 홀연히 이곳으로 올라왔다.
 지난해 화계사 주지인 수경 스님을 만나뵈었을 때 “우리 절에 혜국 스님 상좌가 와 있는데, 참 괜찮은 수좌(선승)”라고 자랑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인묵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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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 따뜻하고 먹을 거리가 지천인 산 아래 세간살이와는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는 출세간인 도솔암의 독살이(홀로 사는 것)를 수척한 그의 얼굴이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며칠 전 감기에 걸렸다고 합니다. 도솔암은 밤이면 산 아래보다 10도 이상 온도가 내려가는 공포의 추위가 엄습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감기에 걸려도 약을 구할 수도 없고, 돌봐 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 때 선승들이 쓰는 비상 수단대로 그는 이틀을 앉은 채 그대로 굶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몸에 붙어서 빌어먹을 게 없었는지 감기가 도망치더라고 했습니다.

뭘 하냐니까 “이렇게 도라지 캔다, 깊은 마음 산천에서”

 이곳에서 양식이 떨어지면 굶든지 눈 속에서 더덕과 도라지 등의 뿌리를 캐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눈이 쌓이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곳이기도 합니다. 혜국 스님이 처음 도솔암에서 겨울을 날 때 방에서 장좌불와를 하는데, 이곳 사정을 잘 아는 한 거사가 찾아와 “스님, 이대로 겨울을 나다간 큰일난다”면서 “암자 부근에 밧줄이라도 매어 놓아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스님은 한참 공부가 잘 되고 있는데, 공부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 응대도 하지 않고 방문도 열어보지 않은 채 참선 정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며칠 뒤 방문을 열어보니 눈이 몇자나 쌓여서 어디가 토방이고 어디가 벼랑 끝인지조차 구분이 안되더라고 합니다. 방문에서 암자 뒷편의 샘까지 가는 길은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위태위태한 길입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난감한 처지인데 가만히 보니, 방문에 밧줄이 묶여 있었습니다. 며칠 전 거사가 이렇게 눈이 쌓여 있을 때 밧줄을 잡고 샘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문에서 샘까지 밧줄을 매어놓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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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자칫 한겨울에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인묵 스님은 산에서 캐온 도라지를 다듬던 손길을 멈춘 채 “이렇게 도라지를 캔다”고 했습니다. 옛사람들은 도라지를 ‘道我知’(도아지·도란 나를 아는 것)라고 했습니다. 그는 도라지타령을 들어 “심심산천(깊은 마음 산천)에서 한두 뿌리씩 캐다 보면 어느덧 대바구니가 넘쳐난다”고 했습니다. 그가 캔 도라지 한 뿌리를 입에 무니, 눈서리 속에서도 버텨낸 그 강한 향내가 온 몸을 깨웠습니다. 제 다구를 덮는 다포에 쓰여 있어 늘 함께 지내는 황벽 선사의 글 귀가 더욱 더 사무치게 다가왔습니다.
 ‘뼈 속에 사무치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야 어찌 코를 쏘는 매화향기를 얻으리오’
 
 태백산/글·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동영상 박종찬 기자 pjc@hani.co.kr·은지희 피디 eun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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