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감춘 선사들의 도량…3대 이은 목숨 건 정진
시·공 사라진 하늘끝에 눈서리 버틴 도라지 향만
지난 15일 경북 봉화군 소천면 고선리 태백산 줄기인 비룡산 홍제골로 들어섰습니다. 도솔암 가는 길입니다. 예부터 선승들은 금강산 마하연,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참선과 기도를 같이 할 수 있는 3대 도량의 하나로 태백산 도솔암을 들었습니다.
도솔암은 이 세 암자 중에서도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으로 첫 손에 꼽혔습니다. 태백산을 손바닥 들여다보는 약초꾼이나 그 곳에서 앞서 정진했던 스님의 안내가 없이는 인적의 접근을 불허하는 곳입니다.
참선-기도 3대 도량…등산로 없고 오솔길조차 눈 덮여
외진 홍제골에 있는 홍제사는 일반 불자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 후미진 산골에서 주지 범종 스님은 이번 동안거 때 세 명의 선승들의 참선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후미진 곳까지 다니려면 차가 없이는 곤란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인데, 범종 스님은 함께 사는 대중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타고 다니던 차까지 팔아야 했습니다. 그런 어려운 처지에서도 범종 스님은 홍제사 위 도솔암과 백련암에서 홀로 수행 중인 선승들의 뒷바라지까지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그 범종 스님, 그리고 스님의 수호신장이나 다름없는 진돗개 해탈이가 앞장 섰습니다. 또 이 인근 청옥산 정상에서 한겨울 목숨을 걸고 생식을 하며 수행 정진한 바 있는 서울 봉은사 선감 성묵 스님이 함께 길을 열었습니다. 대구에서 겨울방학을 맞아 절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 고2 성진이도 도솔암 스님에게 전달할 쌀과 반찬을 지게에 지고 뒤따랐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출발한 지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영상카메라를 멘 박종찬 기자가 디딘 얼음이 깨져 계곡에 빠지는 바람에 등산화가 흠뻑 젖고 말았습니다. 박 기자는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며 그대로 산행을 강행했습니다. 일행들이 눈 싸인 고갯길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를 수차례. 평소 한 시간에 당도할 길은 두 시간을 훌쩍 넘겼습니다.
숨찬 가슴이 막바지 고개 올라채는 순간 앞이 ‘확’
선승은 무엇 때문에 전기도 전화도 없는 이 높고 춥고 외로운 외딴 암자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일까.
이런 의문과 가쁜 숨이 가슴을 옥죄어올 때쯤 멀리서 도솔암 해우소(解憂所·‘근심을 해소하는 곳’이라는 뜻·화장실) 한 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과연 저곳에 오르면 ‘근심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일까.
더욱 숨찬 가슴이 막바지 고개를 올라채는 순간 앞이 확 뚫리면서 갑자기 막힌 시야가 열렸습니다. 지금까지 올라온 골짜기와 달리 도솔암에선 시야가 툭 트였고, 천하의 산이 눈 아래 도열해 있었습니다. 도솔암은 마당 한 뼘 없었고, 마루 밑은 위태위태한 벼랑이었습니다.
도솔암 마루에선 한 스님이 산에서 캐온 도라지를 칼로 다듬고 있었습니다. 인묵 스님이었습니다.
일타도 혜국도 손가락 태워 공양…솔잎 생쌀 생식하며 ‘장자불와’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은둔의 선사들만이 정진했던 도솔암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타 스님(1929~99)이 머문 이후였습니다. 일타는 친가 외가 등 일가친척 49명이 차례로 출가해 석가모니 이후 가장 많은 출가자를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14살에 출가한 분입니다.
일타는 1954년 스물다섯 살에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매일 3천배씩 일주일간 용맹 정진한 뒤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기름을 먹여 열두 마디를 불에 태웠습니다. ‘생명을 다 바치더라도 반드시 깨우쳐 모든 번뇌를 여의리라’는 서원으로 단행한 연지 공양이었습니다. 그의 손이 다 타고 뼈만 남았을 때 맑은 하늘엔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일타는 그 길로 이곳 도솔암에 올라와 목숨을 건 정진 끝에 1년만에 오도송(깨달음의 시)을 불렀습니다.
‘頓忘一夜過(돈망일야과) 時空何所有(시공하소유) 開門花笑來(개문화소래) 光明滿天地(광명만천지)’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내니/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가버렸나/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 구나) *몰록은 찰나간 또는 무시간을 나타내는 선가의 용어.
일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꼬박 5년을 더 이곳에서 정진하며 보림(깨달음을 확고히 함)을 했습니다.
일타의 도솔암 수행을 이어간 이는 일타의 상좌 혜국 스님(충주 석종사 금봉선원장)이었습니다. 혜국은 일타가 자신의 스승인 고경 스님(1883~1946)의 후신으로 여기는 이였습니다. 고경은 조선 제일의 강사였지만 알음알이가 아니라 본성품을 제대로 보기 위해 다음 생엔 ‘바다 건너’(제주)에서 태어나 참선만 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고경이 열반한 지 딱 1년째 되는 같은 달 같은 날에 혜국이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열세 살에 일타에게 출가했기에 일타는 스승이 다시 태어나 자신에게 온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 혜국도 매일 5천배씩 올리는 21일 기도를 두 번한 뒤 해인사 장경각에서 오른손 네 손가락을 불사른 뒤 타고 남은 뼈를 잘라내고 도솔암에 올라 2년 7개월 동안 솔잎과 생쌀과 콩으로 생식을 하고 장좌불와(온종일 자지 않고 눕지도 않는 수행)를 하며 목숨을 건 정진을 했습니다.
“앉은 채 그대로 이틀 굶었더니 감기도 줄행랑”
지금 도솔암을 홀로 지키는 인묵 스님은 그 혜국의 상좌입니다. 3대를 내려오는 도솔암에서의 정진인 셈입니다. 출가 후 20여년 동안 봉암사와 대승사 묘적암, 각화사 동암, 조계산 토굴 등 전국의 은둔처에서 정진해온 그는 출가 뒤 처음으로 서울 북한산 화계사에서 몇 달간 서울살이를 하며 불자들에게 천수경을 가르치던 중 발심해 다시 바랑 하나 메고 홀연히 이곳으로 올라왔다.
지난해 화계사 주지인 수경 스님을 만나뵈었을 때 “우리 절에 혜국 스님 상좌가 와 있는데, 참 괜찮은 수좌(선승)”라고 자랑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인묵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방 따뜻하고 먹을 거리가 지천인 산 아래 세간살이와는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는 출세간인 도솔암의 독살이(홀로 사는 것)를 수척한 그의 얼굴이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며칠 전 감기에 걸렸다고 합니다. 도솔암은 밤이면 산 아래보다 10도 이상 온도가 내려가는 공포의 추위가 엄습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감기에 걸려도 약을 구할 수도 없고, 돌봐 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 때 선승들이 쓰는 비상 수단대로 그는 이틀을 앉은 채 그대로 굶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몸에 붙어서 빌어먹을 게 없었는지 감기가 도망치더라고 했습니다.
뭘 하냐니까 “이렇게 도라지 캔다, 깊은 마음 산천에서”
이곳에서 양식이 떨어지면 굶든지 눈 속에서 더덕과 도라지 등의 뿌리를 캐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눈이 쌓이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곳이기도 합니다. 혜국 스님이 처음 도솔암에서 겨울을 날 때 방에서 장좌불와를 하는데, 이곳 사정을 잘 아는 한 거사가 찾아와 “스님, 이대로 겨울을 나다간 큰일난다”면서 “암자 부근에 밧줄이라도 매어 놓아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스님은 한참 공부가 잘 되고 있는데, 공부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 응대도 하지 않고 방문도 열어보지 않은 채 참선 정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며칠 뒤 방문을 열어보니 눈이 몇자나 쌓여서 어디가 토방이고 어디가 벼랑 끝인지조차 구분이 안되더라고 합니다. 방문에서 암자 뒷편의 샘까지 가는 길은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위태위태한 길입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난감한 처지인데 가만히 보니, 방문에 밧줄이 묶여 있었습니다. 며칠 전 거사가 이렇게 눈이 쌓여 있을 때 밧줄을 잡고 샘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문에서 샘까지 밧줄을 매어놓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칫 한겨울에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인묵 스님은 산에서 캐온 도라지를 다듬던 손길을 멈춘 채 “이렇게 도라지를 캔다”고 했습니다. 옛사람들은 도라지를 ‘道我知’(도아지·도란 나를 아는 것)라고 했습니다. 그는 도라지타령을 들어 “심심산천(깊은 마음 산천)에서 한두 뿌리씩 캐다 보면 어느덧 대바구니가 넘쳐난다”고 했습니다. 그가 캔 도라지 한 뿌리를 입에 무니, 눈서리 속에서도 버텨낸 그 강한 향내가 온 몸을 깨웠습니다. 제 다구를 덮는 다포에 쓰여 있어 늘 함께 지내는 황벽 선사의 글 귀가 더욱 더 사무치게 다가왔습니다.
‘뼈 속에 사무치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야 어찌 코를 쏘는 매화향기를 얻으리오’
태백산/글·사진 조현 기자 cho@hani.co.kr, 동영상 박종찬 기자 pjc@hani.co.kr·은지희 피디 eun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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