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다인으로 맺어진 우정

깜보입니다 2008. 3. 10. 19:53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다인으로 맺어진 우정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다인으로 맺어진 우정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것은 1100여 년 전인 삼국시대 말까지 거슬러 간다. 신라 흥덕왕때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당나라 황제로부터 차의 종자를 받아 지리산 자락으로 전파했고, 이후 선덕여왕 때부터 비로소 차 문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러한 차 문화는 승려나 화랑들 사이에 성행하여 신라문화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이 풍습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전래되었다. 또 고려시대 대 문장가이자 차의 달인이었던 이규보는 차의 맛을 도의 맛이라고 하였다. 다도일미(茶道一味). 즉, 차를 마시고나면 자신의 존재를 잊고 우주와 하나가 되어 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차는 고급문화로 널리 애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학승이자 선승인 초의선사와 대학자 김정희는 차를 매우 사랑했던 인물들인데, 그들에게 차는 단지 기호식품이 아닌 교류의 도구였으며 선과 학문을 수행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일상 중 하나였다. 차를 통해 세상을 풍미했던 초의와 추사의 삶을 따라가 본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차와 선은 하나다 - 초의선사 의순


조선의 차 문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초의선사다. 그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침체되었던 조선시대 불교계에 일대 선풍을 일으킨 선승이며, 한편으로 우리 차 문화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 불리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정조 10년(1786)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난 초의선사의 속성은 장씨이며 호는 초의, 법명은 의순이다. 그는 15세 때 강변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위험에 처했는데 마침 부근을 지나던 승려가 건져주어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다. 당시 이 승려는 그에게 출가를 권하였는데, 그가 이를 받아들여 16세 때 남평 운흥사에서 벽봉스님을 은사로 삼아 승려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초의선사는 불교학 이외에도 유학, 도교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범서(梵書)에도 능통했다. 해남 대흥사에 머무를 때에는 이 주변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각별한 교분을 맺기도 하였으며, 이들과의 교류는 이 땅에 차 문화를 중흥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학승으로서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 동안 정진하면서 책과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빠져들었다. 초의는 특히 차에 지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어 다도에 관한 다신전과 동다송(東茶頌)을 제작하여 다생활의 멋을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은 차와 선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차의 성품이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라 보았고,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도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고도 하였다. 다도는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며, 그 잘 끓은 물과 좋은 차를 적절히 조합하여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그러나 다신전에 나타난 그의 차 끓이는 법을 보면, 그의 다세계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 정성은 그야말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겨울에는 찻잎을 주전자 바닥에 먼저 넣고 끓는 물을 붓는다. 여름에는 끓는 물을 먼저 붓고 물 위에 찻잎을 띄운다. 봄, 가을에는 끓는 물을 절반쯤 붓고 찻잎을 넣은 다음 그 위에 다시 물을 붓는다
- 다신전

그에게는 차와 선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1866년 80세(법랍65세), 일지암에서 서편자락을 향해 가부좌를 한 상태로 그는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우리나라 차에 관한 ‘동다송’과 ‘다신전’을 비롯해 ‘일지암 시고’, ‘일지암 문집’ 등이 있다.

차는 살아있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실존의 국물인 동시에 살 속으로 스미는 상징이다. 그래서 찻잔 속의 자유는 오직 개인의 내면에만 살아 있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요한 소승의 자유이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계통을 부여하려는 논리의 허세가 없다. 차는 책과 다르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과장하거나 증폭시키려는 마음의 충동이 없다. 차는 술과도 다르다. 책은 술과 벗을 부르지만 차는 벗을 부르지 않는다. 혼자서 마시는 차가 가장 고귀하고 여럿이 마시는 차는 귀하지 않다.
- 동다송


다선삼매(茶禪三昧)의 경지에 도달한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자이자 실학자이며, 우리나라 제일의 문장가인 동시에 최고의 명필로 추사체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충남 예산에서 1786년 태어난 그의 호는 완당, 추사, 예당, 시암, 과파, 노과 등이며 자는 원춘이다. 추사의 아버지는 그를 무척 사랑하여 그가 24세 되던 해에 청나라에 동지사로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당대의 석학들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류를 맺었는데, 그들을 통해 금석학과 실학 등을 배웠으며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만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혔다. 특히 청나라 상류사회에서 배운 차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후일 이 차 문화의 영향으로 동년에 태어난 초의선사와 절친한 관계가 되었으며, 초의와의 인연은 무척이나 각별하였다. 추사는 제주 유배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와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차를 마시기도 했고, 초의가 그를 못 잊어 제주도로 건너가 반년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추사가 10년 먼저 세상을 뜨자 초의는 제문을 지어 말하기를 ‘저 세상에 가서 다시 만나 새로이 인연을 맺자’라고까지 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사람의 교류에 고리 역할을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차였다. 언젠가 초의가 만든 차를 맛본 추사는 초의에게 자주 편지를 써서 차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 문구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 차를 빨리 보내달라고 조르는 내용들이었다고 한다. 초의가 차를 제때 보내주지 않으면 그는 다그치듯 서신을 다시 보냈으며, 으르고 을러서 고대하던 차가 도착하면 샘물을 직접 받아 정성껏 달여 차를 음미하였다. 초의가 만든 곡우차를 추사는 특히 좋아하여 천하제일의 차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는 또한 차에 관한 많은 글을 짓고 수백에 달하는 호를 지었다. 예를 들면 ‘승설’·‘고다노인’·‘다문’·‘일로향실’ 등의 호가 있고, 초의에게 차를 선물 받고 써준 ‘명선’·‘죽로지실’·‘다로경권실’·‘다산 초당’ 등이 있다. 이들 중 명선은 초의선사의 또 다른 호가 되었다. 그의 호 중 하나인 ‘경향다로실’은 그가 얼마나 차를 사랑했는지를 말해주기도 한다. 일찍이 초의가 추사의 아우에게 ‘예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좋아했으니 차란 군자와 같아서 사특함이 없다 (古來賢聖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라고 하였는데, 추사는 ‘조용한 가운데 혼자 앉아 차를 마심에 그 향기는 처음과 같고 물은 저절로 흐르고 꽃은 저만치 홀로 피니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라고 화답하였다. 두 사람이 말하는 이 경지들이 모두 다선삼매가 아닐 수 없다. 추사는 또 많은 다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다음의 시구에서 백석(白石)의 소탈한 삶을 부러워하는 애틋함을 담았다.

‘남산의 신선은 무얼 먹고 사는지 / 밤마다 산중에서 백석차를 끓이네 / 세상 사람들은 백석이라고 부르니 / 한평생 살아도 돈이 필요 없다네 ’

게시일 2007-06-05 17:36: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