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 옛 그릇의 투박한 흙내음을 찾아서
고향집 사립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 귀퉁이에 자리했던 장독대. 어머니가 매일 물걸레며 마른걸레로 정갈하게 닦아 반짝반짝 눈부신 옹기가 크기에 따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옹기에는 간장이며 된장, 고추장, 소금, 장아찌 등 온 식구가 일년을 먹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양식이 넉넉히 담겨 있었고, 술래잡기라도 하게 되면 으레 제일 큰 간장독 뒤로 숨어들었다. 술래가 장독대로 다가오면 먼저 달려가려다 옹기를 깨기도 했다. 옹기 안에 들어있던 음식도 그렇지만 유독 어머니가 아끼던 옹기였다면 그 꾸지람은 생각보다 꽤 컸다.
겨울에 구운 항아리를 봄에 사야 좋다 어머니는 좋은 옹기에 음식을 담는 것만으로도 그 맛이 더한다는 것을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었고 가정을 꾸려오면서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항아리는 역시 장독대에 놓여 있어야 제 맛이었다. 옛날에는 장독대의 자리가 좋고 장독이 번듯하고 가지런하면 집안이 흥할 것이라 했고, 이사 갈 때도 장독대부터 옮겨 놓았다. 때로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때론 정안수를 떠놓고 기도를 하기도 했던 곳이 장독대인 것만 봐도 항아리에 대한 조상들의 애정과 옹기에 담긴 먹을거리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쉬이 알 수 있다. 민간에서뿐만 아니라 궁궐에서도 장독을 관리하는 상궁을 별도로 두어 ‘장고마마’라 부르기도 했다. 항아리라고 해서 다 같은 항아리가 아니었다. 오뉴월에 구운 독은 음식이 쉬고 썩기 쉬워 사용하지 않았다. 오뉴월은 장마철이라 항아리가 잘 마르지 않은 상태이고, 가마도 습기가 많아 고온으로 구워도 흙 속에 있는 습기를 다 없애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낙들은 겨울에 구운 항아리를 봄에 사야 좋다고 했다. 좋은 독에 장을 담가 놓으면 소금적이 하얗게 항아리 밖으로 배어 나오는 것을 보고 항아리가 숨을 쉰다고 했다. 또한 가볍게 두드려 봐서 쇳소리가 나면 좋은 옹기로 쳤다. 좋은 독을 골라 장을 담그는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잘 생기고 좋은 옹기를 골라 오일午日에 담그면 맛이 제일 좋고 신일辰日에 담그면 장맛이 시어지고 사일巳日에 담그면 구더기가 생긴다고 하였다. 한편으로 장을 담그고 삼일이 될 때까지는 바깥사람이 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특히 부정한 사람은 장맛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떡은 질시루에 쪄야 제 맛이 나고 밥은 질밥통을 사용해야 아침에 한 밥이 저녁까지 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연질토기인 질그릇이 열에 강하고 수분을 조절하는 기능이 탁월하기 때문이었다.
옹기는 오지그릇과 질그릇으로 합쳐 부르는 말 옹기는 항아리로 대표되는 오지그릇과 시루, 밥통으로 대표되는 질그릇으로 구분된다. 오지그릇은 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구워 윤이 나는 것을 말하고, 질그릇은 진흙만으로 반죽해 구운 후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이 나지 않는 그릇을 말한다. 옹기는 지방마다 모양이 다르고 또 각 특성에 맞게 쓰임새가 다르다. 오지그릇은 토기에서 발전한 치밀질 토기의 일종이고 질그릇은 연질토기에 속한다. 이는 옹기를 굽는 가마의 온도 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불의 온도가 높으면 익히 보아온 도자기가 되며 불의 온도가 낮을수록 연질토기가 된다. 우리 선조들은 두 종류의 옹기를 용도에 따라 적절히 사용했는데, 단단하고 물이 통하지 않아야 하는 용도로 오지그릇을 사용했다. 그리고 수분의 유통이 활발하고 열에 잘 견뎌야 하는 화로나 시루, 밥통은 질그릇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이후 도자기의 발전에 따라 질그릇은 그 강도가 약해 특별한 용도로 일부 사용되었고, 오지그릇이 옹기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도자기 제작 방법과 발전 과정을 짚어보자. 흔히 도자기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도기와 자기를 합친 말로 옹기는 도기에 속하며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등이 자기에 속한다. 도기와 자기는 모두 환원번조로 만들어진 것이다. 환원번조는 도자기를 구울 때 가마의 온도가 섭씨 1,100도 이상 올라가면, 장작을 많이 지피고 가마의 아궁이와 굴뚝을 막아 공기의 유입을 차단한다. 그러면 흙 속에 포함되어 있던 철 성분이 원래의 색인 청색으로 바뀌는데 철 함량에 따라 회색, 회흑색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반대인 산화번조 방식이 있다. 이는 토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도자기를 만들 때보다 불의 온도가 낮으며 가마를 만들지 않고, 노천에서 굽거나 가마를 만들더라도 공기의 유입을 막지 않고 불을 지펴 흙 속에 포함된 철이 산화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토기는 황색, 다갈색, 적갈색 등의 빛깔을 띠며 빗살무늬토기, 무문토기 등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민다. 이러한 옹기는 오지그릇이든 질그릇이든 전자인 환원번조로 구워진다.
옹기는 그릇뿐 아니라 생활도구로서도 널리 사용돼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발효식품을 잘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여러 개의 항아리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예나 지금이나 쓰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오지그릇과 질그릇은 우리 식생활 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해온 것이다. 김치 없이 못산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항아리가 없었다면 밥상에 올라올 수 있는 반찬이 몇 가지나 될까. 지금이야 냉장고가 항아리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 김장을 하고 독에 김치를 넣고 땅 속에 묻어 두면 야채가 부족한 겨울을 걱정 없이 날 수 있었다. 또 현대에 가장 많이 쓰이는 옹기 중에는 단연 뚝배기가 으뜸이다. 불에서 내려놓아도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나 더운 김 모락모락 오르는 국밥을 보면 없던 밥맛도 스르르 돌아오게 마련이다. 요즈음에 뚝배기는 된장찌개뿐 아니라 여러 음식을 끓이거나 담아내는데 쓰이고 있다. 심지어 라면을 뚝배기에 끓이기도 하니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웰빙 트렌드를 타고 옹기가 숨 쉬는 그릇으로서 재평가받는 새로운 계기가 되고 있다. 이밖에 옹기는 그릇으로도 그 소용이 많았지만 선조들의 생활에 밀착되어 있었다. 겨울철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추위를 녹이던 난로가 질그릇이고, 방을 밝히는 등잔이 옹기였으며, 콩나물 시루·약탕관 등도 옹기로 만들어졌다. 또 집의 뒷마당으로 돌아가 보면 굴뚝이 옹기로 만들어져 있고, 지붕을 얹는 기와도 옹기와 같은 성질의 물건이고, 거름을 나르는 장군도 옹기였다. 한편으로 신앙 생활과도 관련이 깊은데 성주단지와 조왕단지가 그렇고, 동해안 지역 내 산신각에 있는 호랑이가 옹기의 일종인 질로 만들어져 있다.
우리 선조들의 잘 익은 마음을 담은 그릇, 옹기 문화재청은 1990년 옹기장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해 전통의 그릇인 옹기 제작 기술을 보존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생활 방식의 변화로 인해 옹기의 선과 문양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한 인테리어 소품이나 전통적인 생활을 즐기려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용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여기에 잿물을 사용하지 않고 납을 산화하여 만든 광명단이라는 화학약품을 사용해 만든 옹기가 제작되면서 옹기의 평판이 나빠지고 있어 아쉽다. 광명단을 사용해서 만든 옹기는 붉은색이 나고 표면이 유리알 같이 매끈하며 영롱한 빛이 난다. 하지만 이러한 옹기는 숨쉬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도자기 역사에 있어 상감청자를 비롯한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가 귀족과 양반이 향유한 그릇이었다면, 옹기는 민초들의 생활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뽐낸 생활도구라고 할 수 있다. 아낙들은 예쁜 옹기를 하나 장만하면, 며칠을 두고 닦으며 맛난 음식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먹일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곤 했다. 어느 곳이어도 좋겠지만 시골 마당에 놓인 옹기를 보게 되면 투박하고 소박한 차림으로 먼 길 가다 편하게 주저앉은 듯한 그 생김을 유심히 보기를 권한다. 옹기장이 손가락으로 마음 가는대로 그려 넣은 대나무 잎 문양이나 풀과 꽃 문양이나 구름 문양 등을 바라보노라면 우리 선조들의 잘 익은 마음 한 자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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