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칼질하고 세번 절하듯 … 이 악물고 새기다 생니 다 빠졌죠”
칼 한번 빗나가면 끝 … 칼끝에 오감 모아
문인화 그리다 서각에 빠져 혼자서 공부
[중앙일보 이만훈]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의 서화 가운데 세한도(歲寒圖)와 더불어 유명한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가 있다. 불이선란도는 추사가 말년에 과천에 기거하면서 ‘20년 만에 난을 쳐 얻은 득의작(得意作 : 뜻대로 이뤄져 작가가 만족해 하는 작품)’으로, 그림과 글씨의 경계를 뭉뚱그린 명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제발(題跋: 책이나 글·그림 등에 유래나 칭찬·비평 등을 적은 글) 4개 중 왼쪽 아래에 있는 문장(吳小山見而豪奪可笑 : ‘오소산’이 이 그림을 보고 얼른 빼앗아 가려는 걸 보니 우습다)에 오소산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고고한 추사가 자신의 그림에까지 그의 이름을 들먹였을까. 알고 보면 간단하다. 본명은 규일(圭一)로 글씨는 물론 글씨 새김을 잘해 추사가 “조선 제일의 각(刻)”이라며 아끼던 제자였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추사 글씨의 편액들은 거의 다 그의 솜씨로 알려져 있다.
150년이 흐른 지금, 바로 그 소산을 흠모하며 ‘천하 제일의 각(刻)’을 꿈꾸는 이가 있다. 24년째 서각(書刻)의 세계에 빠져 사는 청암(靑岩) 김성(金星·50). 그는 현재 전남 강진에 산다. 이곳은 고려청자의 비췻빛 아름다움과 다산의 문기(文氣), 그리고 김영랑의 시가 살아 있는 곳이다.
하지만 반도의 끝자락인 탓에 너무 멀다. 서울서 KTX로 광주까지 가 거기서 곧바로 승용차로 내리 째도 네 시간 반은 좋이 걸린다. 그의 작업실은 강진에서도 아래쪽, 만덕산 자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다산유물전시관 바로 턱밑에 있다.
마악 터지고 있는 동백꽃의 짓붉은 향과 탐진만의 비릿한 갯내음에 취해 도착하니 ‘들꽃 이야기’란 새김 간판이 객을 맞는다. 아하, 벌이가 시원찮아 부인이 찻집을 한다더니…. 차 손님을 위한 것인 듯 집 앞엔 조그만 연못 하며 갖가지 들꽃들을 곁들인 장치가 오밀조밀한데 다실 옆방에서 연신 툭탁 소리가 들린다.
추사가 전서체로 쓴 ‘銀地法臣(은지법신: 절과 부처)’을 가로로 새겨 위에 걸고 ‘無酒學佛有酒學仙(술 없으면 불법을 배우고, 술 있으면 선도를 공부한다네) / 詩中有畵畵中有詩(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네)’를 주련(柱聯 : 기둥이나 벽 등에 써붙인 글귀)으로 붙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청암이 거기 있다.
“가겠노라”고 전화 통기를 하고 천 리를 달려왔건만 문소리, 인기척에도 눈길 하나 주질 않는다. 아예 삼매경이다. 망치질 소리의 강약에 따라 칼날이 혹은 깊게, 혹은 얕게 나무판 위에서 춤을 추면 이내 글씨가 살아나 꿈틀거린다. 한참을 기다리다 못해 소리를 꽥 질러 깨우니 그제야 칼을 놓으며 변명(?)을 한다.
“오감(五感)을 온통 한 곳에 쏟아붓다 보면 사실 옆에 누가 왔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리 안 하면 칼이 빗나가 그동안 해온 작업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니까요.”
하긴 오죽했으면 서각을 한 번 칼질하고 세 번 절한다는 일도삼례(一刀三禮)의 예술이라 했을까. 둘러보니 작업실에는 물론 다실에도 ‘세한도’를 비롯해 ‘죽로지실(竹爐止室)’ ‘사서루(賜書樓)’ ‘계산무진(溪山無盡)’ 등의 편액과 ‘추수재심(秋水<7E94>深)’ ‘명월매화(明月梅花)’ ‘화법유장강만리(畵法有長江萬里)’ 등 예·행·전서로 된 추사의 작품들이 오롯이 살아나 주인장이 따라주는 매화 차보다 진한 문자향(文字香)을 풍겨내고 있다. 이외에도 자신이 쓰고 새긴 작품 하며 중간에 망치거나 맘에 안 들어 구석에 밀어놓은 것들까지 집안이 온통 새김질한 서화 투성이다.
청암은 1999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대한민국서예·문인화대전에서 ‘용비어천갗로 특선한 것을 비롯해 10여 차례 수상을 했고, 대한민국문인화대전초대작가전(2002년),국립해양박물관초대전(2007년) 등 각종 전시회를 통해 역량을 인정받은 서각 부문의 중견 작가다. 한때 한국문화학교 강사와 서남권평생교육원 강사를 역임하기도 한 그는 특히 1996년부터 3년에 걸쳐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해례본 목판본을 최초로 완각[책을 찍어내기 위한 반서각(反書刻) 판본과 작품으로 보기 위한 정서각(正書刻) 판본을 함께 완성함]하는 업적을 이뤄 주목을 받았다. 이들 판본은 각각 광주시립민속박물관과 목포대박물관에 기증해 소장돼 있다. 청암은 이 밖에도 2003년 3개월 걸려 ‘세한도’를, 2006년엔 세 번의 시도 끝에 ‘불이선란도’를 3개월 만에 각각 완성하는 가 하면 지난해엔 1년을 꼬박 들여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이어 5개월 만에 올 초 국보 제217호인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완각해 완숙의 경지(정말 기가 막히다!)에 이르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아직도 멀었지만 그나마 지금 정도 할 수 있는 건 어릴 적부터 서화를 익힌 덕분입니다.”
무안 태생인 그는 원래 남종화 계열의 문인화가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한학자인 할아버지가 초등 6년 때 친구인 남농[南農 : 한국화의 대가인 허건(許楗·1907~87) 선생을 가리킴. 남농은 그의 호]에게 맡기는 바람에 3년간 사군자와 소나무 등 한국화를 익혔고 이후에도 스물여섯까지는 동인전에 참가하는 등 죽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림보다는 보다 역동적인, 몸으로 하는 게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찾아낸 것이 慕?서각. 작은아버지가 목수이고 매형이 서각을 하던 터라 그동안 어깨 너머로 보아온 것도 있어서 금세 익힐 것 같았다. 여기에는 뭔가를 한번 보면 즉각 재현해 내고야 마는 자신의 손재주와 근성에 대한 믿음도 한몫했다.
그래서 85년 활동 무대도 아예 목포에서 강진으로 옮겨버렸다. 풍광이 좋은 데다 각종 문화예술 활동이 활발하던 곳이라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기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하려니 막상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공부할 관련 책자가 있기를 하나, 가르침을 받을 스승이 있기를 하나….
“싸구려 관광상품을 만드는 데도 찾아가 보았지만 그나마도 문전박대를 당했어요. 결국 오기 하나로 독공(獨工)을 했어요. 이왕 칼을 뽑았으니 썩은 호박이라도 찔러봐야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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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각(刻)의 본질을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 추사, 원교 이광사, 창암 이삼만 등의 필각(筆刻)이 있는 해남 대흥사와 일지암을 시작으로 팔만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 등 전국의 명필각은 다 찾아보았다. 이 공부를 통해 서각이란 결국 필의(筆意)를 한 치의 훼손 없이 도의(刀意)로 살려내는 과정이란 걸 깨달았다.
이와 더불어 나무도 겨울철 물이 빠진 뒤에 베어내 1~2년간 그대로 사계절을 겪게 한 뒤 판재로 켜 바람이 잘 통하는 응달에서 다시 2~3년을 말려야 작품이 변형되지 않는다는 걸 새로 배웠다. 그리고 칼을 잡았다. 처음엔 손을 다치기도 했지만 10년쯤 용맹정진(勇猛精進)하니 “각 좀 한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5년쯤 더 하자 이번엔 먹의 농담과 필의 속도 등 글자의 기운까지 저절로 읽혀졌다.
“서각을 제대로 하려면 글자의 기운을 잘 읽어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죽어버리니까요. 이젠 딱 보면 느껴져요. 서예가인 아버지한테 6년쯤 한문과 글씨를 배운 데다 남농 선생님이 특히 ‘글씨이건 그림이건 기본은 모두 선(線)’이라며 매섭게 훈련시켰는데 다 그분들 덕분입니다.”
청암은 특히 추사 글씨를 좋아한다. 자신과 기가 가장 잘 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년엔 주로 추사 글씨를 작품으로 한다. 지난해 3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열린 ‘서각으로 보는 추사의 예술 세계’ 특별전이 대표적이다. 이 특별전에는 ‘세한도’ ‘영영백운도(英英白雲圖)’ ‘불이선란도’ ‘명선(茗禪’) ‘사야(史野)’ 등 명작 30점이 선보였다.
“추사의 글씨는 조형미가 대담하면서도 기운이 생동합니다. 선생의 거만하고 까다로우면서도 내면으론 부드러운 강렬한 선비 정신 말입니다.”
요즘 그는 매년 평균 50~60점의 작품을 한다. 일단 작품을 시작하면 여름이고 겨울이고 아침 5시부터 시작해 삼시 세 끼 밥먹는 시간을 제하곤 밤 11시까지 꼬박 매달린다. 집중을 하느라 이를 앙 다물고 하는 바람에 대작(大作)을 할 때마다 이가 하나씩 빠져 생니가 하나도 없을 정도다. 만성적인 어깨 통증도 얻었다.
그의 솜씨는 머리카락 굵기의 파필(破筆)까지 표현해낼 정도로 정치하고 능숙하다. 그런 만큼 공도 많이 들어 작품 가격이 비싸다. 웬만한 대작은 수천만원씩 한다.
“절대로 비싼 게 아닙니다. 초짜 목수라도 일당이 최하 15만~30만원 됩니다. 저 같은 숙련공이 몇 달씩 걸려 만든다고 생각해 보세요. 또 나무 값은 어떻고요? 쓸 만한 건 부르는 게 값이에요. 8년 전 장흥의 수몰 지구에서 300년 된 느티나무를 한 그루 구해오는데 1500만원 들었을 정도예요.”
엄살인지 몰라도 그는 담뱃값(하루 두 갑. 술은 전혀 못한다)밖에 못 벌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틴다고 털어놓는다. 기증을 하면 했지, 작품을 절대로 헐값에 팔지 않는다. 작품마다 드러내놓고 자신의 사인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할 때마다 사흘 전부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음식도 가려 먹는다. 작품에 삿된 기운이 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정말 ‘소산’이 다 돼 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마지막 독백은 차라리 절규처럼 울림이 크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 팔만대장경 등 서각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96년에야 겨우 무형문화재(제106호 각자장)로 지정됐을 정도로 아직도 크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어 서각 인구는 고작 5000여 명(아마추어 포함)밖에 안 됩니다. 일본의 경우 80만 명이 넘는데도 말입니다. 이를 계승 발전시키려면 서각인부터 작품에 대한 뜨거운 열정, 자신감과 함께 성의가 필수입니다. 프로 정신 말입니다.”
글=이만훈 인터뷰 전문기자
, 사진=프리랜서 오종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