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하늘이 감춘 땅] 문경 운달산 금선대

깜보입니다 2008. 5. 1. 11:15
하늘이 감춘 땅] 문경 운달산 금선대

 

일흔 노승은 간 데 없고 텅빈 암자에 솔바람만
술도 연애도 하되 스님답게 하라던 법문 ‘쟁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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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 산북면 김룡리.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운달산에 둘러싼 김룡사의 자태는 고고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김룡사는 신라 진평왕 10년(588년) 운달조사가 산 정상 부근 토굴 금선대에서 정진하다가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소가 누워있는 지세’에 세웠다는 절입니다. 보장문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왕벚꽃이 만개한 웃음으로 반겼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화사한 왕벚꽃마저도 김룡사의 고풍스런 매혹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불이 나 새로 지은 대웅전 앞 건물 외엔 하나같이 고풍스런 목재건물과 돌담, 돌 하나하나에 스민 이끼들이 천년의 족적을 말해주었습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오랜 옛날 천연 돌로 조각해놓은 약사여래불이 그 후덕한 모습으로 맞아주었습니다. 또한 그 왼쪽으로는 돌을 정교하게 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올려 쌓은 탑이 이끼에 싸여 있습니다. 꾸밈없는 불상과 탑에선 청정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계곡 건너 명부전은 소의 눈에 해당하는 지세에 지었다고 하는데, 한 눈에 보아도 명당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명부전 주위의 소나무들은 어찌나 푸르던지요. 특히 명부전쪽에서 바라보는 김룡사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참으로 정숙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듯했습니다.

 

생의 마지막을 살다가 죽겠노라며 흘러 들어

 

그 김룡사를 뒤로 하고, 운달산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대성암을 지나 계곡 옆에 화장암이란 암자가 숨어있었습니다. 계곡 옆에 집채만한 바위들을 옮겨 쌓은 축대 위에 지어진 암자였습니다. 포크레인도 불도저도 없었을 그 옛날 길도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저리 큰 바윗돌들을 옮겨 축대를 쌓았는지 그들의 정성이 신묘하고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큰 바위 옆 나무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빗장을 걸어 놓은 문틈 사이로 무인지경의 고요가 흘러나왔습니다. 산승은 어디에 간 것일까요. 의문을 남겨둔 채 이제 본격적으로 금선대를 향해 가파른 산을 올랐습니다. 김룡사를 출발해 산길을 오른 지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 것입니다. 길 끝나는 저 언덕 위에 하얀 지붕의 조그만 누옥이 서 있었습니다. 금선대였습니다. 금선(金仙)은 말 그대로는 ‘금 신선’이지만 불가에선 ‘부처’를 금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 금선대는 ‘부처가 머무르는 곳’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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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딴 누옥에선 성철 스님과 서옹 스님, 서암 스님, 그리고 현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 등 4명의 종정을 비롯해 기라성 같은 고승들이 홀로 용맹정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사람이 어찌 찻길도 없고, 전기도 없는 이런 곳에서 살아가려 할 것입니까. 그래서 천하의 길지인 이곳조차 최근엔 비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70이 다 된 한 노승이 김룡사를 찾아 금선대에서 살겠다고 했답니다. 금선대에서 생의 마지막을 살다가 죽겠노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3일 전 홀로 산에 올라갔다는 노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법당 옆에 한 몸을 겨우 누일 법한 방엔 금선대를 거쳐 간 산승들이 홀로 앉아 고독의 심연 속에서 불성을 밝힌 좌복(방석)이 놓여있을 뿐이었습니다. 좌복 아래 손을 넣어보니 불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노승이 이곳에서 어제 밤을 보낸 흔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승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주인 없는 좌복에 앉아보았습니다. 불과 20여분의 참선이었지만, 그대로 번뇌를 벗어난 해탈진경의 자리였습니다. 참선이 끝나고 한참을 더 앉아있어도 노승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은자로 살아온 정영 스님 “세상에 ‘절대’란 없다”

 

마루에 앉아 노승을 기다리는 사이 옛선승의 자취가 솔바람에 실려 왔습니다. 1980년대 초 세상엔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선승이 금선대에서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정영(1925~95) 스님이었습니다. 평생 은자로 살아온 그를 스승처럼 따랐던 효림 스님(실천불교승가회 의장)으로부터 정영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효림 스님이 젊은 날 금선대로 정영 스님을 찾았을 때 그가 궁금증이 치밀어 오르던 얘기를 드디어 꺼냈다고 합니다.

 

“스님, 출가자는 절대로 술 마시면 안 됩니까?”
“….”
“스님, 출가자는 절대 연애도 해서는 안 됩니까?”

 

출가의 길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열여덟 어린 나이에 출가한 효림은 한 번 출가하면 친구들이 하는 세상일은 이제 영영 할 수 없게 되는 것인지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는 것입니다. 한참 술도 마시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을 그 나이에 그에겐 어느 새 승복이 입혀져 있었으나 그 때만해도 세간과 출세간의 차이를 제대로 분별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애타게 묻는 효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영 스님이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절대’란 없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님의 입에서 자신이 원하는 첫 마디가 새어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효림스님이 알기로 정영 스님은 세상 그 어느 스님보다 청정하기 이를 데 없는 스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그에게 정영 스님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엔 깡패가 마시는 술이 있고, 학생이 마시는 술이 있고, 교사가 마시는 술이 있다. 중이 깡패처럼 술을 마셔서야 되겠느냐.”

 

“어떻게 마시는 것이 중답게 마시는 것입니까?”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 중이 술을 마시는 방법이다. 연애 또한 마찬가지다.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 중이 연애하는 방법이다. 아무리 계율을 잘 지키고, 칭찬받을 행동만 해도 그것이 남을 의식해서 박수받기 위해 한 것이라면 수행에 해가 될 뿐이며, 어떤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수행의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수행을 돕게 되는 것이다.”

 

7달 생식하며 정진하다 우연히 먹은 사과의 유혹에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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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림 스님이 전해주던 얘기를 곱씹으며 두어시간을 기다려도 노승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대 조사의 어록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정영 스님의 활구 법문이 솔바람처럼 속내까지 뚫어주었습니다.

 

빈집을 향해 손을 모으고 뒤돌아서면서 스님의 공양 간을 들여다보니 들깻가루 두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외딴 암자나 토굴에서 정진하며 생식을 하는 스님들이 생쌀이나 솔잎, 콩과 함께 주로 먹는 것입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만이 아니라 먹는 것도 세간의 화려함을 떠나 있는 산사에선 모든 감각이 순일해지기에 마장도 더욱 크게 느껴지기 마련일 것입니다. 사람 구경하기 어려운 곳에서 여자를 보면 선녀로 보일 것이고, 들깻가루나 솔잎으로 연명하던 차에 맛있는 것을 먹으면 천도복숭아로 느껴질 게 분명합니다.

 

수경 스님(화계사 주지)도 이곳에서 7개월간 생식을 하며 정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도 우연히 들른 등산객이 전해준 사과 하나를 먹은 뒤 그 사과 맛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어서 하산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끔은 이곳에서 해발 1097미터인 운달산 정상에 올랐다가 어떻게 이곳까지 오는 사람들이 있었나봅니다. 사람들 중엔 떼거리로 몰려다니면 객기가 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명이 암자에 들렀을 때는 샘가에서 밥을 해먹으며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고도 이를 지적하는 스님을 보고 시비를 붙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정영 스님이 홀로 정진할 때도 간혹 등산객들이 이곳까지 오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깊은 산중에서 홀로 수행하는 선승에게 그런 등산객들의 등장은 곤혹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효림 스님이 한번은 “그런 등산객들이 금선대에 들이닥칠 때 어떻게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정영 스님은 “등산객들에게 이렇게 하지 말라, 어째라하면서 나무라면 시비가 되고, 반발을 하기도 하는데, 멀리서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스스로 겸연쩍어 하며 쓰레기를 말끔히 치우고는 살금살금 산을 내려간다”면서 “말보다는 침묵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불상 하나 없이 30년 수도한 선승, 빗장 걸고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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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대를 뒤로 하고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인적이 없는 한적한 오솔길에서 나무들의 기운이 성성했습니다. 그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니 곧 다시 화장암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화장암의 빗장을 열고 들어가 빈 암자의 적막에 잠겨보았습니다. 그러자 잠시 뒤 바랑을 멘 청초한 선승이 들어섰습니다. 이 화장암의 암주였습니다. 그 역시 금선대의 정영처럼 화장암에서 30여 년간 아무도 몰래 숨어서 도를 닦아온 은자였습니다.

 

바랑 속엔 그가 사온 고추 묘목이 들어있었습니다. 금선대의 노승도 이렇게 고추의 묘목이나 쌀을 구하러 하산하거나 나물을 캐러 가느라 잠시 암자를 비웠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은자는 봉암사 선방에서 참선을 하다가 결국 이곳에 숨어들어 무려 30여년을 홀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불상 하나 없고, 신자도 없는 이 절에서 그는 어떻게 30여년을 보냈을까요.

 

그 오랜 고독의 삶을 살아온 은자에게 모처럼 만난 객이 반가울 법 하건만 그는 말 몇 마디를 나눈 뒤 두 말 없이 다시 화장암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침묵에 잠겼습니다. ‘화장(華藏)’은 부처의 진리로 장엄된 세계입니다. 화장암의 돌과 잔디와 이끼와 장작 하나 하나가 부처의 화현처럼 빛났습니다. 그런데 화장암 밖을 나서니 푸른 나무와 맑은 계곡 등 온 산이 또한 화장세계였습니다. 길 따라 상경길, 그리고 당신과 내가 사는 바로 이곳에서 화장 세계가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문경 운달산/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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