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감춘 땅] 문경 운달산 금선대
일흔 노승은 간 데 없고 텅빈 암자에 솔바람만
술도 연애도 하되 스님답게 하라던 법문 ‘쟁쟁’

경북 문경 산북면 김룡리.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운달산에 둘러싼 김룡사의 자태는 고고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김룡사는 신라 진평왕 10년(588년) 운달조사가 산 정상 부근 토굴 금선대에서 정진하다가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소가 누워있는 지세’에 세웠다는 절입니다. 보장문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왕벚꽃이 만개한 웃음으로 반겼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화사한 왕벚꽃마저도 김룡사의 고풍스런 매혹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불이 나 새로 지은 대웅전 앞 건물 외엔 하나같이 고풍스런 목재건물과 돌담, 돌 하나하나에 스민 이끼들이 천년의 족적을 말해주었습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오랜 옛날 천연 돌로 조각해놓은 약사여래불이 그 후덕한 모습으로 맞아주었습니다. 또한 그 왼쪽으로는 돌을 정교하게 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올려 쌓은 탑이 이끼에 싸여 있습니다. 꾸밈없는 불상과 탑에선 청정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계곡 건너 명부전은 소의 눈에 해당하는 지세에 지었다고 하는데, 한 눈에 보아도 명당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명부전 주위의 소나무들은 어찌나 푸르던지요. 특히 명부전쪽에서 바라보는 김룡사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참으로 정숙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듯했습니다.
생의 마지막을 살다가 죽겠노라며 흘러 들어
그 김룡사를 뒤로 하고, 운달산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대성암을 지나 계곡 옆에 화장암이란 암자가 숨어있었습니다. 계곡 옆에 집채만한 바위들을 옮겨 쌓은 축대 위에 지어진 암자였습니다. 포크레인도 불도저도 없었을 그 옛날 길도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저리 큰 바윗돌들을 옮겨 축대를 쌓았는지 그들의 정성이 신묘하고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큰 바위 옆 나무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빗장을 걸어 놓은 문틈 사이로 무인지경의 고요가 흘러나왔습니다. 산승은 어디에 간 것일까요. 의문을 남겨둔 채 이제 본격적으로 금선대를 향해 가파른 산을 올랐습니다. 김룡사를 출발해 산길을 오른 지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 것입니다. 길 끝나는 저 언덕 위에 하얀 지붕의 조그만 누옥이 서 있었습니다. 금선대였습니다. 금선(金仙)은 말 그대로는 ‘금 신선’이지만 불가에선 ‘부처’를 금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 금선대는 ‘부처가 머무르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 외딴 누옥에선 성철 스님과 서옹 스님, 서암 스님, 그리고 현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 등 4명의 종정을 비롯해 기라성 같은 고승들이 홀로 용맹정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사람이 어찌 찻길도 없고, 전기도 없는 이런 곳에서 살아가려 할 것입니까. 그래서 천하의 길지인 이곳조차 최근엔 비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70이 다 된 한 노승이 김룡사를 찾아 금선대에서 살겠다고 했답니다. 금선대에서 생의 마지막을 살다가 죽겠노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3일 전 홀로 산에 올라갔다는 노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법당 옆에 한 몸을 겨우 누일 법한 방엔 금선대를 거쳐 간 산승들이 홀로 앉아 고독의 심연 속에서 불성을 밝힌 좌복(방석)이 놓여있을 뿐이었습니다. 좌복 아래 손을 넣어보니 불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노승이 이곳에서 어제 밤을 보낸 흔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승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주인 없는 좌복에 앉아보았습니다. 불과 20여분의 참선이었지만, 그대로 번뇌를 벗어난 해탈진경의 자리였습니다. 참선이 끝나고 한참을 더 앉아있어도 노승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