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진도와안면도

깜보입니다 2008. 7. 2. 09:17
바닷길 따라 떠나는 문화재 여행

국토의 서남단 끝자락에 자리한 진도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답게 진도의 산자락 어디든 마주하는 풍광은 섬들로 넘실거리고, 바다를 향해 펼쳐진 들녘은 시원스럽기 이를 데 없다. 풍광도 아름답지만, 진도는 예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독특하고도 멋스런 문화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강강술래, 남도 들노래, 진도씻김굿, 다시래기 등 네 종목이 국가지정무형문화재로, 진도 만가와 북놀이가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그림 같은 풍광과 남도의 운치를 가득 담은 진도를 둘러본다.

예향진도 - 풍광 속에 스민 사람들의 멋스런 흥취
흥과 멋이 가득한 진도의 소리 - 진도의 무형문화재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나았네~ 에에에~
진도아리랑의 후렴부는 꺾어야 제 맛이 난다. 어떻게 보면 흥겹고 어떻게 보면 구슬프기도 하다. 진도 사람들에게 노래는 삶의 일부인 듯싶다. 진도에서 사람이 좀 모이는 곳에 있다보면 어김없이 아리랑 한 자락을 듣게 된다. 추임새를 넣어가며 덩실덩실 춤까지 춰가며 부르는 아리랑 자락이 진도의 풍경과 어우러져 절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진도에서는 음식점이나 여관이나 술집 어디를 가도 그림 한두 점 걸리지 않은 집이 없고, 삶의 희로애락이 있는 곳엔 언제나 노랫가락이 울려 퍼진다. 진도는 예부터 그래왔다.
이 신명난 흥취는 진도의 지형, 역사와 무관치 않다. 지금이야 다리가 연결되어 육계도가 되었지만 예전 육지와 떨어진 섬자락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들이 기름져 삶이 넉넉했고 이 넉넉한 삶 속에서 오는 여유와 풍요로움이 진도의 흥을 일구었을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진도는 남도에서도 소문난 유배지였다. 오죽하면 전라감사가 “진도에 유배자가 너무 많아 주민들이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굶어죽을 판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 고 건의를 했을 정도다. 유배 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중앙정계에서 밀려온 식자층이었으니 이들의 소양이 전파되어 그림이나 서예 같은 고급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진도 향토문화회관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진도의 가락과 춤을 만나볼 수 있는 상설공연이 열린다. 원형이 잘 보존된 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8호와 진도아리랑, 남도 들노래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의 흥취를 느껴볼 수 있으며 죽은 사람의 원혼을 달래는 진도씻김굿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과 출상 전날 밤 마을사람들과 상두꾼들이 꾸미는 마당극의 일종인 다시래기중요무형문화재 제81호는 진도 영등살 무렵을 전후해 공연되고 있다.

삼별초의 흔적을 찾아서 - 남도석성과 용장산성









진도는 고려시대 대몽항전의 중심이었던 삼별초의 얼이 서린 곳이다. 고려 원종 때 조정이 몽고와 강화를 맺게 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원종의 육촌인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1,000여 척의 배에 만이천의 병력을 이끌고 진도로 내려온다. 벽파진 근처의 용장산에 행궁을 짓고 본격적인 대몽항쟁을 펼치게 된다. 진도에 자리를 잡은 삼별초군은 한동안 전라도 일부와 제주도 지방을 함락시키며 크게 세력을 떨친다. 그러나 1271년 5월, 고려의 장수 김방경과 몽고 장수 홍다구가 이끄는 여몽 연합군에 의해 패퇴하게 되고 이 싸움에서 배중손과 왕온이 전사하며 기세가 크게 꺾이고 만다. 이후 제주도로 건너간 삼별초군은 2년 여 동안 끈질긴 항쟁을 펼치지만 마침내 원종 13년1273 2월, 여몽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고 만다. 현재 용장산성은 석축으로 이루어진 건물터가 12개 남아있고 그 주변으로 420m에 이르는 토성이 둘려 있으며 사적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도석성은 삼별초가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는 말이 있지만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성으로 알려져 있다. 성 앞의 남도포는 동쪽의 금갑포와 함께 제주와 남해안을 잇는 길목으로 고려시대에는 왜구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곽은 높이 4m, 폭 2.5~3m에 둘레가 526m이며 임진왜란 때에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은 것이라고 한다. 사적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도의 또 다른 문화유적, 볼거리
군내면 둔전리의 금골산193m은 높이는 낮지만 경사가 급하고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산이다. 이 산자락 바로 아래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금골산 오층석탑보물 제529호이 자리하고 있으며, 산정상부에 기묘한 형태의 바위에는 마애여래좌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이 새겨져 있다. 산자락에 오르면 진도의 너른 들과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한편 진도로 들어오는 진도대교 아래의 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명랑해전이 펼쳐졌던 울돌목이다. 물살이 빠르고 험해 큰 배들도 거스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진도대교 주변의 망금산 전망대와 우수영관광지 전망대에 오르면 시원스런 진도대교와 울돌목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진도에서 다도해의 풍경을 보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섬의 남쪽에 자리한 급치산221m과 동석산236m, 세방전망대 등지에서 아름다운 다도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태안 -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아늑한 모래밭
태안군은 길쭉한 해안선을 따라 학암포, 몽산포, 만리포, 연포 같은 이름난 해수욕장과 서해안자락의 대표적 관광지인 안면도가 자리하고 있다. 신진도, 목개도, 거아도, 외도, 장고도 등 아름다운 섬들을 한데 묶어 태안해안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지난겨울, 태안 앞 바다에는 큰 일이 벌어졌다. 유출된 검은 기름이 해안과 바다를 뒤덮은 것이다.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역주민들과 전국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해안은 빠른 속도로 회복됐고 바다도 점차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생태계가 완전히 복원되려면 더 오랜 세월이 흘러야겠지만 사람의 손길로 지켜낸 해안에는 다시 황홀한 노을이 빛을 발하고 있다.

서해, 그 장엄한 노을 속으로 - 안면도
태안반도의 끝자락, 길게 이어진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조선 인조 때인 1638년,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세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물길을 만들면서 섬이 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에 이르러 섬과 뭍을 연결하는 연륙교가 가설되면서 다시 뭍이 되었다. 물이 맑고 모래의 질이 좋아 여름철 해수욕 인파로도 붐비지만 이곳을 찾는 발길은 사시사철 끊임이 없다. 일몰이 특히 아름답고 안락한 펜션들이 밀집되어 분위기 좋아하는 낭만주의 여행자들에게 최적의 여행지이다. 안면도의 중심에 자리한 꽃지 해수욕장은 대천 해수욕장에 이어 서해안 자락에서 두 번째로 큰 백사장을 지니고 있다. 전국 3대 낙조의 하나로 꼽히는 꽃지 일몰은 해안가에 자리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 두 바위에는 애닮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신라 때 바다를 장악했던 장보고가 최전방기지인 안면도에 승언장군을 지휘관으로 보냈다. 승언장군의 부인은 빼어난 미모를 지녔는데 두 사람의 금술이 하도 좋아 부하병사들의 질투가 심했다. 이를 안 승언장군은 바다 위, 두개의 바위섬에 초가집을 짓고 떨어져 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정을 나간 장군이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은 내내 바다만 바라보다 망부석이 되어버렸고 두 바위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다.

태안의 천연기념물 - 모감주나무와 소나무 군락, 신두리해안사구
안면도에 들어서면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시선을 끈다. 이곳은 원래 섬 전체가 소나무 군락지로 조선 왕실에 필요한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만든 인공 숲이었다. 세월이 변모하면서 왕실도 없어지고 솔숲의 면적도 줄었지만 승언리의 숲은 아직도 무성하다. 승언리에는 휴양림이 들어서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훌륭한 산책로와 운치 있는 숙소를 제공하고 있다. 방포해안에 자리한 모감주나무 군락은 1962년 천연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가 2m 안팎인 모감주나무 500여 그루가 빽빽하게 모여 군락을 이루고 있다. 모감주나무는 원래 중국에서 자생하는 식물인데 6~7월이면 노란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모감주열매는 염주알로 쓰이기 때문에 절에서 정원수로도 많이 심는다. 안면도의 모감주나무는 씨앗이 바닷물길을 타고 중국 산동반도에서 떠내려 와 바닷가에 닿으면서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안군 이원면의 신두리 해안사구천연기념물 제431호는 우리나라 최대의 사구지대로 알려져 있다. 사구는 육지와 바다의 완충지대로 해안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농토를 보호하고 바닷물의 유입을 자연스럽게 막는 역할을 한다. 신두리사구는 빙하기 이후 약 1만 5천 년 전 부터 서서히 형성된 것으로 북서풍과 파도에 의해 모래가 해안가로 운반되면서 오랜 세월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에는 해안 사구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는데, 해당화 군락지, 통보리사초, 모래지치, 갯완두, 갯매꽃을 비롯하여 갯방풍과 같이 희귀식물들이 분포하여 있으며 표범장지뱀, 종다리, 맹꽁이, 쇠똥구리, 사구의 웅덩이에 산란을 하는 아무르산개구리, 금개구리 등이 서식하고 있다. 광활한 모습이 우리나라 유일의 사막으로 알려져 태안군 관광자원의 한 축으로도 명성을 높이고 있다.


태안의 문화유적 - 뱃길을 보살피던 마애불과 서해교역의 관문 안흥성
태안읍에 자리한 백화산 등성 바위에는 세부처가 새겨져 있다. 국보 제307호인 태안마애삼존불이다. 서산마애삼존불에 비해 마모가 되어 덜 알려져 있으나 조성연대는 그보다 앞선 시기로 추정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치자면 원조 마애삼존불인 셈이다. 가운데 본존불이 큰 여느 삼존불에 비해 태안마애삼존불은 양 옆으로 2m 남짓한 여래상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는 1.3m 가량의 보살이 보관을 쓴 모습으로 서있다. 세 부처의 명칭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았지만 왼쪽이 석가여래, 가운데가 관음보살, 오른쪽은 약사여래로 보고 있다. 태안마애삼존불은 대략 7세기쯤 서산마애삼존불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다. 다만 그 형태가 단순하고 조각수법이 소박한 것으로 미루어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서해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백제 말기 당나라와의 교역길이 평탄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새겨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흥항은 조선시대에 번성했던 항구였다. 바로 앞 섬인 신진도에는 아직도 중국 성인 퉁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중국인들의 왕래가 잦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이 항구를 드나들던 명나라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안흥항에 보기 좋게 성을 쌓고 호화로운 집들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안흥성은 큰 영화를 누렸으나 동학농민전쟁 당시 무너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안흥성은 도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