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문화유산 이야기꾼,
후배 시인 고은이 서정주를 가리켜 시인공화국의 ‘정부’(政府)라 일컫었을 때의 그 맥락에서, 유홍준 교수(명지대 미술사학과)도 문화유산과 미술사에 관해선 하나의 ‘정부’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로 문화유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폭발시켰다는 점에서, <완당평전>이나 <화인열전 1·2>에서 보여준 전문성과 대중성을 아울러 겸비한 학자라는 점에서, 그 앞에 이름을 올릴 학자는 많지 않아 보인다. 또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문화재청장으로 문화재 정책의 수장까지 지냈으니, 이 말이 과히 틀리지는 않을 터.
유홍준이라는 ‘정부’
그런 그가 새 책을 들고 대중 곁으로 돌아왔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이하 <강의>)은 이미 시리즈를 예고하고 있거니와(그는 3권을 완간으로 현재 2권을 집필 중이다), 정무직 공무원 신분으로 활발한 지적 활동에 제약(?)을 받아온 그가 이제 학자로서 본격적인 복귀를 신고하는 것으로 읽힌다. 유 교수가 이 책을 쓰게 된 건 1년 전 가졌던 학부생들과의 면담에서 비롯됐다. 학부생들은 그에게 한국미술사에 대한 개론서나 길잡이 책이 없어서 ‘맨땅에 헤딩’한다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같은 책은 나중에 쓰시고 ‘나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쓰시면 안 되느냐”는 항의성 요구를 했다. 대학원 강의에서 이에 대해 물으니, 석·박사 과정생들도 이구동성으로 원망을 토로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이 공부할 때도 한국미술사에 대한 개론서나 통사가 없어 독학하듯 고생한 기억이 겹치면서, 결국 다시 펜을 들게 되었다.
<강의>는 이처럼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을 위한 입문서의 필요성에서 펴낸 책이지만, <나의 문화유산답084사기>와 같이 교양과 상식을 위해 한국미술사에 눈길을 보내는 대중이 봐도 이해하기 쉽게 쓰였다. 글이 잘 읽힌다는 점은 여전한 이야기꾼인 유홍준 교수의 글맛과 더불어 기존 한국미술사 저서들의 건축·미술 등 장르적 구분과는 다른 체제와 전개 방식을 택한 이 책의 장점에서도 흘러나온다. 선사시대부터 발해까지 열두 테마로 엮은 <강의>는 삼국시대를 각국의 고분미술과 불교미술로 나눠 설명했고, 사리함과 향로는 ‘백제미에 보내는 경의’ 차원에서 따로 장을 마련했다. 유물에 얽힌 일화나 제작 배경이 그 성격을 오롯이 보여주는 경우, 비록 미술사 밖의 얘기라 할지라도 빼놓지 않았다. 예컨대 신라 고분 발굴의 역사, 안악3호 무덤의 피장자 논쟁, 백제 미륵사와 신라 황룡사의 창건을 설명한 부분 등이다. ‘외도’라 불릴 수도 있는 이런 설명에 대해 그는 “강의 때 학생들이 아주 재밌고 유익하게 듣는 모습을 보면서 책에도 그대로 반영했다”고 말한다. 이 책이 의미와 더불어 재미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겨레21>과 인터넷 서점 알라딘, 출판사 눌와가 함께 주최한 <강의>의 저자 강연회는 첫눈 소식이 흩날리던 지난 11월8일 서울 종로구 정독도서관에서 열렸다. 강연회 시작 전, 미술사의 매력에 흠뻑 빠진 두 명의 독자와 함께 유홍준 교수를 먼저 만났다. 팬이던 아버지 덕분에 자연스럽게 유 교수의 책을 접한 송준(30·치의예과 재학)씨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개안’을 했다는 주윤아(25·경영학과 재학)씨 모두 전공보다 미술사가 더 좋아 진로 변경을 심각하게 고민 중인 예비 미술사학도다. 공부를 막 시작하려는 두 명의 젊은 애독자가 저자와 나눈 대화는 선학의 조언과 후학의 경청으로 시종 진지했다. 가볍게 시작한 질문에도 선배의 답변은 문화사와 미술사를 넘나들며 폭과 깊이가 만만치 않았다.
한국, 당당한 문화적 주주국가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와 관련해 외국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미술작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어느 나라나 그 나라를 대표하는 것은 건축”이라며 “파리·아테네·로마·이집트 등 어느 나라를 가봐도 우리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건축, 그다음이 박물관에 있는 미술작품”이라고 답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건축이라는 줄기에 미술이라는 꽃”이라면서, 이런 점에서 “미술사는 문화사의 꽃인 까닭에, 미술사를 모르는 사람이 문화사를 알 방법이 없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무엇이 제일 좋으냐는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 외국인이 좋아할 만한 건축물은 무엇이냐는 물음이 나온 것은 그래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가장 감동받는 것은 건축 가운데서도 왕궁과 궁궐이다. 궁궐에는 한 시대의 문화 능력이 집약됐기 때문이다. G20 정상회의 기간에 창덕궁 답사가 들어가 있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말마따나 서울이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롯해 여러 궁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궁궐조차 없는 서울은 아파트와 고층건물에 둘러싸인 회색도시에 불과할 테니. 우키요에(에도시대부터 유행한 일본의 풍속판화)가 인상주의에 영향을 준 것처럼, 한국 미술이 일본에 영향을 주지 않았느냐는 다소 고답적인 질문에는 “왜 그렇게 영향을 주고받는 것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고 정색했다. “영향을 줘야 우등한 것이고, 영향을 받으면 열등한 건가”라고 반문한 뒤 “일본 미술이 유럽의 인상주의에 영향을 준 것은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당시 유럽이 일본의 차나 도자기 포장지 등을 보고 반한 것에서 출발했다”며 “우리는 그 시대에 유럽과의 교역이 없었기 때문에 영향을 줄 일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은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로 가늠되지 않는다. 유럽 중세의 기독교 문화를 아무도 유대 문화의 아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중국의 불교미술이 인도에서 왔다고 낮게 평하는 일이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불교미술은 한국 문화인 것이다.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 자신의 문화를 더 발전시킨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중략) 고려 사람마저 청자를 만들지 못했다면 세계 청자의 역사는 중국 청자의 역사 하나로 끝날 뻔했다. 한국이 빠진 동아시아 문화사는 이처럼 불완전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당당한 지분율을 가진 문화적 주주국가다.” 쉬어가는 질문, 한류에 대해서는 “사실 한류가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는 백제와 가야가 일본에 영향을 준 것 말고는 경험이 없었다. 그것도 우리가 주도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저 가져간 것이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우리는 문화의 공급국이었던 적이 없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에 더해 “동남아 국가들이 보기에 한국은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며 “선망의 대상일 뿐인 유럽보다는 벤치마킹 대상으로 바라보는 한국이 큰 매력이 있을 텐데, 경험이 없는 탓인지 우리 쪽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이러다가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그들 나라가 한류를 더 이상 안 받겠다고 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한편, ‘휴대전화·자동차를 더 팔면 되지 한류가 뭐 대수냐’는 시각에 대해서는 “한류라는 문화적 컨피던스 덕분에 휴대전화·자동차가 더 잘 팔릴 수 있다. 이것이 한류의 실제적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한류가 밥 먹여준다’는 것이다.
후세에 물려줄 21세기 문화유산은 뭘까
동양 문화나 한국 문화에 젊은이의 관심이 적은 편인데 이것의 대안을 묻는 질문엔 “젊은이를 특별히 끌어올 마음은 없다. 관심사대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다소 냉소적으로 말했다. 다만 “지금의 낮은 관심은 한국 문화나 미술사에 대한 콘텐츠나 홍보가 부족해서라기보단 일상생활에서 문화를 향유하고 누릴 줄 아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며 “선배 세대들부터 먹고사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그리 되었을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미술사라는 긴 항해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유 교수는 한국미술사라는 ‘본류’로 가기 전, 서양미술사라는 ‘대류’를 먼저 경험해볼 것을 당부했다. 한국 미술에 국한된 책부터 공부할 것이 아니라,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같은 고전을 통해 미술사라는 큰 틀을 먼저 느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다음에야 한국 미술에 눈이 뜨일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1시간의 ‘강의’를 마친 유 교수는 담배 한 개비를 맛있게 피운 뒤, 본 강연에 들어갔다. 강당에는 청소년에서 어르신까지 200여 명의 청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별명(‘유구라’)대로 신라 고분 발굴의 역사부터 황룡사 9층 석탑 복원 문제까지 적절한 비유와 차진 말솜씨를 섞어가며 청중의 눈과 귀를 빼앗았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주제도 그의 달변을 거치면 묘한 흡입력을 지닌 이야기가 되었다. 그에게는 강단이 더 어울려 보였다. 흥미로웠던 이야기 하나. 선덕여왕은 황룡사 9층 석탑 1층에서 9층까지 신라가 물리쳐야 할 적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중국·일본·탐라 등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데, 백제와 고구려는 없다. 서로 죽이려 했던 것으로 흔히들 알고 있는 삼국전쟁과 통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둘. 20세기에 지은 건물 가운데 문화유산으로 남을 건물은 하나도 없다. 아파트와 빌딩이 문화유산이 되겠나. 재벌들이 서울 시내에 호화주택을 짓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날의 모든 건축기술을 총동원해 지을 것이 아닌가. 그게 후세를 위한 것이다. 위화감 조성 때문에 안 된다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어느 시대나 문화유산으로 남는 것은 지배계급의 문화다. 보통 사람들의 주택이나 유물은 문화유산으로 남기 어렵다. 상속세를 세게 매겨서 3대쯤 물려주다가 국가에 귀속되게 하면 된다. 그래서 후손에게 당대의 건축양식을 물려줘야 한다. 문화유산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말했던 그. 그는 이미 대중에게 또 한 번 문화재 사랑 바이러스를 감염시키고 있었다.. 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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