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성격이 변하고 있다. 인문학은 실용과 손잡고, 글로벌화에 따라 초국성과 지역성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했다.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융합 시도 역시 두드러진다. 이 같은 학계의 횡단 움직임을 세 차례에 걸쳐 다룬다.
“인문학이 실용에 밀려 위기를 겪고 있다….”
인문학 위기의 주요 담론이다. 그러나 인문과 실용을 대척점에 놓는 것은 이제 낡은 방식이다. 쉽게 이해되고 삶에 도움을 주는 이른바 ‘실용 인문학’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죽음학, 행복학, 아리랑학 등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학제적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 또 산업현장에 응용할 수 있는 인문학인 문화콘텐츠학과가 주류가 돼가고 있다.
한국죽음학회는 지난 12일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 라인’을 펴내고 서울대병원에서 선포식 및 유언장 서명식을 열어 눈길을 끌었다. 이곳은 죽음이 인간의 마지막 성장 기회이며 웰다잉이 웰빙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웰다잉 가이드 라인’은 말기 질환을 알리는 방법, 말기 질환 판정을 받은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글, 임종 직전 죽음이 가까웠을 때의 증상, 떠나는 것 받아들이기와 작별 인사, 장례, 고인을 보낸 이의 슬픔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 등 발병에서 임종까지 단계마다 필요한 상식과 함께 유언장, 사전의료의향서 양식을 담았다. 가이드 라인 작성에는 학회장인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한국학)를 비롯해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내과학), 박복순 을지대 교수(장례지도학), 이찬수 강남대 교수(종교철학) 등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지난 2005년 발족한 한국죽음학회는 죽음의 의미, 대처방식 등을 다양한 학문분야에 걸쳐 연구해왔다. ‘신비가들이 체험한 사후세계’, ‘인간의 생명과 존엄사’ 등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최준식 회장은 “학회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과분할 만큼 많은 관심과 격려를 받아왔다”면서 “죽음에 대한 언급 자체를 기피하고 의미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문화를 바꿔내는 것이 학회의 역할”이라고 밝혔다.
행복학 역시 요즘 뜨고 있는 학문이다. 행복학은 2000년대 초반 하버드대의 탈 벤 샤하르 교수가 강의를 개설하면서 화제가 됐다. 1980년대말 마틴 셀리그먼이란 심리학자가 주창한 긍정심리학이 토대가 됐으며 미국 대학에서는 현재 200여개 강좌가 운영 중이다. <몰입>이란 저서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적극 주창해 미 클레어몬트대학원대학교에는 행복학 박사과정도 설치될 만큼 정식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김창민 서울대 교수가 2008년부터 교양과정으로 ‘행복학’ 강의를 개설했다. 또 올초에는 서울대 심리학과 심리과학연구소 산하에 행복연구센터가 설립됐다. 센터 설립을 추진한 최인철 교수(심리학)는 “우후죽순처럼 행복과 관련된 담론이 나오지만 행복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기관이 있었으면 했다”면서 “모든 행복 연구와 사상, 종교를 정리해 일종의 백과사전처럼 제공하는 싱크탱크가 필요하다”고 센터 설립의 추진 배경을 밝혔다.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는 아리랑학을 내세우고 있다. 전국에 산재한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사를 설명해주는 주요한 개념이란 취지에서 비롯됐다. 조용호 연구원은 “고려말, 조선초로 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아리랑은 참요(미래의 행복이나 불행 방지를 기원하는 노래)의 성격을 갖고 있다”며 “아리랑 가사의 변천을 추적해보면 숨겨져 있던 우리 언어와 역사, 문화의 많은 부분이 새롭게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소는 지난 17일 ‘아리랑학 확립의 길’이란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아리랑의 음곡뿐 아니라 형질 전승, 조선과 일본에서 전승된 아리랑, 아리랑과 국가의 대외이미지 등 다양한 문제를 논의했다.
인문학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키워드를 도입하는 경향은 출판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문학동네가 올해 초부터 내놓기 시작한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고문헌연구가인 박철상씨의 <세한도>,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의 <정조의 비밀편지>, 정병설 서울대 교수의 <구운몽도>, 김문식 단국대 교수의 <왕세자의 입학식> 등 다섯권이 한꺼번에 나온 데 이어 <처녀귀신> <은행나무, 동방의 성자> <왕의 묘소> 등 30권까지 계획돼 있다. 이중 <세한도>와 <정조의 비밀편지>는 5쇄까지 찍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한편 대학교육 현장에서는 응용인문학 혹은 실용인문학이라고 불리는 문화콘텐츠학이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한양대, 한국외국어대, 상지대, 상명대, 호서대, 목포대, 전주대, 경남대 등이 운영 중이며 올들어 건국대, 아주대 등이 신설했다. 전국콘텐츠학과협의회에 소속된 대학이 전문대학까지 합치면 120개에 이를 만큼 호황이다.
이중 상명대의 경우 역사콘텐츠학이 특징이다. 이 대학은 2006년 인문학부에 역사콘텐츠 전공을 만들었으며 지난해부터 학과제로 바뀌면서 첫 신입생을 선발했다. 기존 사학과 전공수업을 4분의 3 정도 남겨둔 상태에서 역사지식을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수업을 곁들인 것이 특징이다. 해당과목은 인터넷 역사정보의 검색과 활용, 역사자료의 소재 분석과 스토리텔링, 영상역사학의 이론과 실습, 역사문화의 원형과 콘텐츠 등이다. 디지털미디어학부, 국제통상학과와 연계전공도 시행하고 있다.
이 학과 주진오 교수는 “순수한 학문적 성격을 남겨두면서도 역사지식을 문화산업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며 “기존 사학과 시절에는 학생들이 고학년이 될수록 전공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고 취업준비에 몰두한 반면, 역사콘텐츠학과로 바뀐 뒤에는 전공 공부가 취업에 필요한 지식과 연계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설명했다.
호서대 역시 동양철학자로 잘 알려진 김교빈 교수가 주도해 철학과를 문화기획학과로 바꾸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경우로 꼽힌다. 이 대학은 학과 소속을 아예 인문대학에서 예체능대학으로 바꿨다. 김교빈 교수는 “한국전통문화론, 동양문화론 등을 강의하는데 풍부한 스토리를 끌어낼 뿐 아니라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는데 초점을 둔다”면서 “기초학문으로서 인문학의 연구와 발전이 중요하지만, 모든 대학이 기초학문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유창국 전국콘텐츠학과협의회장(경남대 교수)은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지방사립대학 인문학과의 절반가량이 문화콘텐츠학을 모색하고 있다”면서 “대학별로 장르를 차별화하는 것과 함께 관련 기관·기업 등의 인프라 지원, 실질적인 인턴십 등 취업과 더욱 연계되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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