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스크랩] 장승, 길목에 서서 민중과 함께 숨 쉬다.

깜보입니다 2010. 12. 9. 08:34

전통공예품이나 관광기념품을 파는 곳에 가면 크고 작은 장승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현대로 오면서 길거리에 세우는 장승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민속물 중 하나라는 사실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장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장승학교, 장승마을, 장승축제 등이 잇따라 생기고 있는 추세입니다.

마을과 사찰의 수호신으로, 지역 간 경계를 표시하는 도구로, 방향과 거리를 가르쳐주는 이정표로, 그리고 개인의 소원성취를 비는 민속신앙의 대상이었던 장승. 민중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장승에 대해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장서각소장 국학자료(http://yoksa.aks.ac.kr)의 도움을 받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장승이란?
장승은 마을 어귀, 또는 사찰 입구에 세운 사람 모양의 목상이나 석상으로, 대개 남녀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남상(男像)에는 천하대장군·상원대장군, 그리고 여상(女像)에는 지하대장군이라는 글씨를 써 넣습니다. 이러한 장승은 지역 간의 경계표시, 또는 이정표(里程標)의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합니다. 특히 장승은 마을의 수호와 안녕, 풍요 등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지내는 동제(洞祭)의 주신(主神)이 되기도 합니다.

솟대와 장승 (새창)
  솟대와 장승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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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의 기원은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 사찰의 토지경계 표지에서 유래되었다는 장생고표지설(長生庫標識說), 솟대·선돌·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퉁구스기원설·남방벼농사기원설·환태평양기원설 등과 같은 비교민속기원설 등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만,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원시 신앙적 조형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요.

현존하는 최초의 장승 기록은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의 비명(碑銘)이며, 그 뒤의 기록으로는 1085년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의 국장생과 황장생, 1689년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석장릉, 1725년의 전라북도 남원군 실상사의 석장승 등이 있습니다. 또한 《용재총화(慵齋叢話)》,《해동가요(海東歌謠)》 등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장승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장승의 종류와 형태
장승은 본래 장생, 장성, 장신, 벅수, 법수 등으로도 불렸으며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용된 재료에 따라 목장승과 석장승, 그리고 복합장승으로 분류됩니다. 특이한 점은 지역적으로 다르게 분포한다는 것인데, 나무로 된 장승은 경기나 충청 지방에 주로 분포된 반면 돌장승은 호남, 영남, 제주 지방에 많이 있다고 합니다.

목장승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나무를 많이 사용하지만, 비바람에 의해 1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부식되는 경우가 많아 매년, 혹은 2~3년 마다 새로 만들어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수명이 긴 밤나무를 이용해서 장승을 만들기도 하며, 장승에 황토칠을 하거나 페인트칠을 해서 수명을 연장시키기도 합니다. 목장승의 형태는 나무 장대에 새를 조각하여 올려놓은 솟대형과, 통나무에 먹으로 인면(人面)을 그리고 글자를 써 놓은 목주형(木柱形), 인태신(人態神)을 조각한 신장조상형(神將彫像形)이 있습니다.

목장승 (새창)
  목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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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암석인 화강암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화강암은 석질이 견고하여 풍화나 마모에 잘 견디지만, 세밀한 조각이 어렵고 화재 등 고열에 쉽게 파열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석장승의 형태로는 선돌형·석적형(石蹟形)·석비형(石碑形)·돌무더기형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합장승은 흙무더기나 돌무더기에 솟대와 석인(石人) 등이 복합된 형태를 말합니다.

석장승 (새창)
  석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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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은 생김새에 따라 인면형(人面形)·귀면형(鬼面形)·미륵형(彌勒形) 등으로 분류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면형의 경우,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남장승은 부릅뜬 눈, 덧니, 그리고 수염이 있으며, 간혹 몸체를 붉은 색으로 칠하기도 합니다. 여장승은 관이 없는 대신에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몸체를 청색으로 칠하기도 합니다.

귀면형은 왕방울만한 눈과 주먹코를 가지고 있으며, 송곳니를 드러내거나 앞니가 삐져나와 있는 것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무섭고 크게 노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때로는 익살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미륵형의 경우 불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긴 했으나, 불상 보다는 좀 더 친밀감이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 장승의 역할과 기능
장승은 기능에 따라 이름이 구별되고, 위치, 명문, 생김새 등이 달라집니다.

■ 마을수호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승이 마을을 보호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마을 어귀에 있는 서낭당에 남녀 한 쌍으로 세우는 장승은 흉년이나 재앙, 유행병 등을 가져오는 귀신과 역신을 겁주어 쫓아낸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각 마을에서는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액운을 막고 전염병을 물리치기 위해 장승제를 지냈는데, 이때 오래되어 부패한 장승은 새것으로 교체했습니다.

장승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장승제를 지내는 모습 (새창)
  장승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장승제를 지내는 모습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 바로가기


■ 방위수호
옛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풍수지리적으로 잘 자리 잡고 있는가의 여부가 마을의 흥망을 좌우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방향의 맥이 약할 경우, 그곳에 장승을 세워 약한 맥을 메워주어야 마을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지요. 이처럼 방위 수호를 위해 세운 장승에는 민속적 신명(神名)이 등장하는데, 동쪽에 있는 장승에는 동방청제축귀장군(東方靑帝逐鬼將軍), 서쪽에는 서방백제축귀장군(西方白帝逐鬼將軍), 남쪽에는 남방적제축귀장군(南方赤帝逐鬼將軍), 북쪽에는 북방흑제축귀장군(北方黑帝逐鬼將軍)이라고 써서 잡귀를 쫓았습니다.

■ 불법수호
원래 불교에서는 해탈문, 사천왕문, 나한상, 금강역사상 등이 사찰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친숙한 장승을 사찰 어귀에 세우기 시작하면서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장승이 자연스럽게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찰 어귀에 세워진 장승은 사악한 것을 내쫓아 경내의 청정을 유지해 주었고, 인근에 있는 마을까지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 경계표와 이정표
장승은 마을이나 지역 간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우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남원 실상사의 석장승입니다. 또한 어느 지점까지의 방향과 거리를 알려주기 위해 세우기도 했는데, 이렇게 이정표 역할을 하는 장승들은 관로와 우역 제도가 발달하고 이용도가 높아져 도읍이나 역참 사이에 정확한 이정이 필요해진 조선시대에 많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정표 역할을 한다고 해서 단순히 방향과 거리만 알려주었던 것이 아니라, 도로의 수호와 여행의 안전을 보살피는 노신(路神)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남원 실상사 석장승 (새창)
  남원 실상사 석장승
     출처 : 문화재청               ☞ 바로가기


■ 성문수호
성의 여러 방향에는 성문이 있어 이곳으로 사람이나 말, 수레 등이 드나들었습니다. 각각의 성문에는 군졸을 거느린 수문장이 출입을 감시·통제했는데, 문제는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수문장이라도 액을 가져오는 악귀나 전염병을 퍼뜨리는 역신을 막을 수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장승을 세워 성문을 수호하도록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주도에 있는 돌하르방입니다.

돌하르방 (새창)
  돌하르방
     출처 : 문화재청               ☞ 바로가기


■ 기타
시간이 흐를수록 장승은 개인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장승의 코나 눈을 갈아 달여 마시면 낙태가 된다(혹은 임신이 된다는 말도 있음)”고 하여 실제로 이를 먹기도 했으며, 첩을 두고자 하는 남편을 막기 위해 아내가 장승의 돌가루를 먹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가루가 학질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어 달여 먹기도 했지요.

주목할 만한 것은 장승에게 아이, 특히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당시 아들을 많이 낳는다는 것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는 뜻이고, 이는 곧 경제적인 풍요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 신상이 따로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남근형 장승입니다.


>> 민속 문화 속 장승
다양한 무속신앙과 더불어 민속 문화의 소산으로서 오늘날까지 전승·발전되고 있는 장승은 속담이나 설화, 지명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장승과 관련된 속담
벅수 같이 서 있다.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을 나타내는 말)
장승 얼굴에다 분가루 발라놓고 분 값 내라고 한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 때)
개가 장승 무서운 줄 알면 오줌 눌까? (아무것도 모르고 저지르는 일을 두고 하는 말)
먹기는 아귀같이 하고 일은 장승같이 한다. (게으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
키가 구척장승 같다. (키가 멋없이 큰 사람을 가리키는 말)

■ 장승에 관한 설화와 판소리
명관치장승설화(名官治長丞說話)
한 비단장수가 장승에 기대어 잠시 조는 사이 비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원님을 찾아와 비단을 찾아달라고 애원했고, 이에 원님은 장승을 끌고 와 당장 비단을 내놓으라며 매를 쳤지요.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왔는데, 원님은 불경스럽다고 하면서 벌을 받기 싫으면 당장 비단 한 필씩을 바치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바친 비단 중에 비단장수가 잃어버린 물건이 있었고, 덕분에 범인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
땔감을 구하러 지리산에 온 변강쇠는 나무 베는 것이 귀찮아 함양 고갯마루에 있는 장승을 패가지고 와서 장작으로 써버립니다. 이에 함양의 장승귀신이 장승들의 우두머리인 대방장승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화가 난 대방장승은 전국팔도의 장승들을 모두 불러 모읍니다. 장승들은 변강쇠에게 1만 가지 질병을 주었고,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 장승 관련 지명
장승과 관련된 지명은 전국에 771개소가 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노량진에 있는 ‘장승배기’라는 지명입니다. 조선시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 근교로 옮기고 해마다 이곳을 참배했습니다. 묘소까지 가려면 중간에 한 번씩 쉬어야 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장승배기 일대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나무가 울창하고 적막하여 한낮에도 오싹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습니다. 이에 정조는 그곳에 두 개의 장승을 세우도록 명을 내렸는데, 이는 이정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왕이 쉬는 장소에 잡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세워진 이래로 이 지역은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 참고사이트·문헌
    한국장승학교 (http://www.jangsung.org/korea/sub/main.htm)
    우리 문화 바로 알기 - 장승 (
http://user.chollian.net/~kdhgadin/2-21.htm)
    네이버캐스트 (
http://navercast.naver.com/geographic/heritage/3350)
    <장승과 벅수> / 김두하 / 대원사(1997)
    <한국의 박물관 3> / 한국박물관연구회 / 문예마당(2000)

>국가지식포털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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