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스크랩] 생존을 위한 대한제국의 국가 상징물

깜보입니다 2010. 12. 29. 10:51

 


 

 

대한제국의 탄생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1년여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의 주도로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탄생하였다. 대한제국은 한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황제국가였지만 그 존립기반은 대단히 취약하였다. 대한제국 성립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던 열강의 세력균형은 러시아와 일본의 타협을 바탕으로 한 잠정적이고 불안정한 것이었고, 개혁의 방향과 방법에 대한 여러 정치세력의 대립과 국가재정의 만성적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대한제국의 정치적·경제적 역량은 보잘 것 없었다. 이처럼 제국주의 시대의 약소국이었던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자주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부국강병이 급선무였지만 거기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당면 목표는 열강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문명국가,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과시하는 데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서구적인 독립국가·문명국가의 상징물

 

과거 조선시대에 중국은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이자 유일한 황제국가였으며, 조선은 그 제후국이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선포는 바로 그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제 동아시아적 황제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어야 했으며, 이를 위해서 중국의 정통왕조로 여겨진 명나라로부터 여러 제도가 도입되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 직전에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단인 환구단이 만들어지고, 황제가 임어하는 경운궁의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진행되었으며, 선대 왕들을 황제로 격상하고 황제의 아들을 친왕親王으로 책봉한 것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황제의 색깔이라 하여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황금색이 황제와 관련된 행사에서 사용되었던 것도 커다란 변화였다. 아래의 [그림 4]는 환구단에서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후 황제의 옥보玉寶와 황태자의 책보冊寶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오는 광경을 그린 반차도班次圖인데, 황제의 옥보를 실은 가마와 호위 인사들의 황금색과 황태자 책보 주변의 붉은색이 대조를 이룬다.


 

 

세계의 패권이 유럽으로 옮겨진 당시의 상황에서 이러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황제국가를 모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제는 중국 중심의 화이론적 국제질서(중화체제)에서 벗어나 서구 중심의 ‘만국공법’적 국제질서를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제국도 이제 생존을 위해서는 서구적인 기준에서 문명국가, 근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춤으로써 ‘만국공법’의 적용을 받는 자주독립국가임을 인정받아야 했다. 대한제국기에 활발했던 국기·국가·훈장 등 각종 국가 상징물 제정 작업은 바로 이러한 서구적 기준에서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제창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는 이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1882년 5월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와 같은 해 8월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할 때 태극팔괘기를 국기로 준비했다가, 1883년 1월부터 그것을 간략화한 태극사괘기를 공식적인 국기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아직 국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고 대한제국에 들어와서야 독립협회·독립신문을 중심으로 한 계몽활동에 힘입어 국기를 게양하거나 국기에 대한 예절을 갖추는 것이 확산되었다. 1897년 8월 22일 고종 탄신일 때에는 서울 시민들이 각처에 국기를 많이 달았으며, 1899년 3월 19일 황태자 탄신일에도 각 관청과 민가에서 국기를 달았다고 한다. [그림 1]는 처음에 국기로 고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팔괘기이며, [그림 6]과 [그림 7]은 1895년과 1900년에 발행된 우표인데, 가운데에 태극 문양을 넣고 주변은 오얏꽃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국가의 상징물로 국가國歌도 필요했다. 1902년 1월 ‘인심을 분발시키고 사기를 장려함으로써 충성하고 애국하게 하는 데에는 국가를 부르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마땅히 만들어야 할 것이다’라는 고종의 조칙에 따라 당시 군악 교사로 와 있던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학교 등을 통하여 국가를 널리 알리려고 했지만 어려운 가사와 일본의 방해로 보급이 쉽지 않았다. 현재의 국가인 ‘애국가’는 안익태가 1935년에 작곡한 것에 ‘무궁화가’의 가사를 붙인 것이다.


대한제국의 훈장에 들어간 문양

 

국가 상징물의 하나로 훈장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훈장제도는 국가에 공을 세운 관리나 군인, 민간인에게 수여함으로써 그 공을 기리고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만 외국의 원수나 외교관 등에게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는 효과도 있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당면목표와 일치하였다. 따라서 1900년 4월 ‘훈장조례’를 반포하면서 고종은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려 훈장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옛날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꿈에서 금척金尺을 얻었는데 나라를 세워 왕통을 전하게 된 것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천하를 마름질해서 다스린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높은 대훈장의 이름을 ‘금척’이라 하고, 그 다음을 ‘이화李花’라고 하니 대개 나라의 문양國文에서 취한 것이다. 그 다음 문관의 훈장은 ‘태극장太極章’이라고 하여 8등급으로 나누었으니, 이것은 나라의 표상國標에서 취한 것이다. 그 다음 무공武功에 대한 훈장도 8등급으로 나누고 ‘자응장紫鷹章’이라 하였으니, 이 역시 고황제의 빛나는 무공에 대한 고사故事에서 취한 것이다. 무릇 황족들과 신하들은 금척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방도를 체득하고, 매처럼 용맹을 떨친 업적을 본받아 안으로는 이화의 문양을 잊지 말고 밖으로는 태극의 표식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어찌 나 한 사람만 그대들의 큰 공적을 가상히 여겨 영예를 포장   章하리요. 하늘에 계신 고황제의 영혼도 기뻐서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니, 각기 힘쓰라.

 

이렇게 제정된 훈장은 가장 먼저 대한제국(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은 일본 · 미국 · 영국 · 프랑스 · 독일 · 러시아 · 오스트리아 · 청 등의 국왕과 대통령에게 수여되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일본의 천황, 프랑스의 대통령, 독일 · 벨기에 · 이탈리아의 황제 등도 자기 나라의 최고 훈장을 보내왔다. 대한제국이 훈장제도를 도입하고 각국 원수에게 훈장을 수여한 데에는 외교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은 물론, 대한제국 및 대한제국의 황제가 그들과 동등한 위상을 가지는, 즉 ‘만국공법’의 적용을 받는 자주독립국가임을 확인받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대한제국 상징물의 역사적 의미

 

이전까지 명확하지 않았던 여러 문양의 의미와 위계가 위에서 인용한 고종의 조서에 따라 어느 정도 밝혀졌다. 금척은 조선의 건국설화라 할 수 있는 태조의 금척설화金尺說話에서, 이화(오얏꽃)는 나라의 문양에서, 태극은 나라의 표상에서, 자응(매)은 역시 태조의 고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여 이들 문양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금척-이화-태극-자응의 순서로 등급을 정했던 것이다. 이처럼 국가와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을 집대성하여 체계화한 것은 대한제국이 국가 상징물을 정리하여 활용할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과 고종은 생존, 즉 독립국가와 황제로서의 지위 유지를 위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상징물 이외에 서구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국가 상징물을 제정하는 등 안간힘을 다했지만, 실질적인 국력의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명실상부한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글·사진 | 이윤상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화재사랑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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