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스크랩] 세계의 문화유산이 된 조선왕릉

깜보입니다 2011. 1. 10. 09:55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 왕릉의 독특한 건축 및 조경 양식, 역사적 전통, 그리고 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관리되고 보존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남한에 있는 조선 왕릉 40기를 한꺼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보러가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1972년 유네스코가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인류를 위해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을 말합니다. 따라서 조선의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우리의 유산을 넘어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전 세계가 공인했다는 점은 당연히 자랑스러워 할 일이지만, 정작 우리는 조선 왕릉이 왕과 왕비들의 무덤이라는 사실 말고는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도대체 조선의 왕릉에는 어떤 특별함이 숨어있기에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일까요?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조선왕릉전시관(http://royaltombs.cha.go.kr)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조선 왕릉
1392년부터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세월을 이어온 조선은 27대에 걸쳐 왕과 왕비를 배출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500년 넘게 유지된 것도 드문 일이지만, 재위했던 모든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 왕릉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나누어집니다.

능(陵)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추존(追尊)왕과 추존왕비의 무덤도 포함되지요. 추존왕이란 살아 있을 때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사람을 말합니다. 추존왕의 부인 역시 추존왕비가 되며 이들의 자녀들도 공주와 대군으로 봉해집니다. 
원(園)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합니다. 사친은 종실(宗室)로서 왕위를 이어받은 임금의 친어버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묘(墓) 정궁(正宮)에게서 태어난 대군과 공주, 후궁의 소생인 군과 옹주, 후궁, 귀인 등 나머지 왕족의 무덤을 말합니다. 

 

■ 왕릉의 입지 및 조영
왕릉을 만들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능의 위치를 결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도성 10리 밖 100리 이내에 위치해야 한다는 입지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도성과 너무 가깝지 않으면서도 참배행렬이 찾아가는데 부담스럽지 않은 장소에 능을 축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실제로 조선의 왕릉은 여주의 영릉, 영월의 장릉, 그리고 북한의 제릉과 후릉을 제외하면 모두 서울 사대문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 (새창)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
출처 : 문화재청 세종대왕유적관리소            ☞ 바로가기


그러나 아무리 접근성이 좋아도 주변 산세와 지형 등 자연조건이 맞지 않으면 왕릉의 입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풍수지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었기 때문에 ‘명당’이 아닌 곳은 아예 후보지가 될 자격도 없었던 것이지요.

일단 입지가 정해지면 어느 방향에 봉분이 위치할 것인지, 그리고 어느 방향을 바라보도록 조성할 것인지 등 세세한 부분까지 논의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하다보니 능의 입지를 선정하는 데에만 보통 수개월에서 수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건물을 지을 때 언제나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조화적인 조영술을 지향했습니다. 그러한 자세는 왕릉을 만들 때에도 다르지 않아서, 가급적 본래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지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인공적인 시설을 설치했습니다. 이는 왕릉 또한 자연환경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능역 공사는 대략 3~5개월 정도 소요되었고, 동원된 인원은 6~9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 왕릉의 공간 구성
조선시대의 능역은 크게 산 자의 공간,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공간, 그리고 죽은 자의 공간으로 나누어집니다.

* 산 자를 위한 ‘진입 공간’
이곳은 재실, 금천교, 홍살문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말합니다.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을 지나 능역에 들어서면 돌로 만든 금천교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커다란 붉은색 문이 나타나는데, 이 문이 바로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해주는 홍살문입니다.

홍살문 (새창)
홍살문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바로가기


*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전이 공간’
홍살문 앞에 깔려 있는 돌길은 제사를 모시는 공간인 정자각까지 이어집니다. 이 돌길을 ’참도’라 부르는데, 참도는 다시 ‘신도’와 ‘어도’로 나누어집니다. 왼쪽의 신도는 능의 주인이 다니는 길로서 오른쪽의 어도보다 약간 더 높습니다.

정자각의 양 옆으로는 제례 준비 공간인 수라방과 능침을 지키는 사람의 공간인 수복방이 있습니다. 또한 정자각 뒤쪽에는 축문을 태워 묻는 예감,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산신석, 수장된 왕의 업적을 나타내는 비각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새창)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출처 : 조선왕릉전시관                                  ☞ 바로가기


* 죽은 자를 위한 ‘능침 공간’
정자각 뒤에는 작은 동산이 있는데 이를 사초지라 합니다. 세 개의 긴 장대석이 사초지를 세단계로 구분해 놓았는데, 이들은 각각 하계(下階), 중계(中階), 상계(上階)를 상징합니다.

하계에는 무인석과 석마가 있고, 중계에는 문인석과 석마, 그리고 장명등이 있습니다.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은 무관보다는 문관을 더 우대하는 나라였습니다. 문인석이 무인석보다 한 단계 높은 중계에 설치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지요.

가장 높은 상계에는 왕릉의 핵심인 능침 공간이 있습니다. 봉분의 좌우 및 뒷면에는 능침의 보호를 위해 돌담을 둘러놓았습니다. 둥근 봉문은 보통 방위를 나타내는 12면의 병풍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병풍석에는 십이지의 그림과 글자 등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석양, 석호, 망주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 조선 왕릉의 제례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을 때, 유네스코는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적인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음’을 등재 이유의 하나로 밝혔습니다. 6백년을 이어온 왕릉의 제례에 담긴 무형의 정신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는 뜻이지요.

산릉제례(山陵祭禮)는 능에 직접 행차해서 치르는 왕과 왕비에 대한 제사를 말합니다. 정기적인 제례는 사시, 납일, 속절, 삭망에 치르는데, 사시는 봄·여름·가을·겨울을 가리키며 1월·4월·7월·10월의 초순을 가리킵니다. 납일은 동지 후 세 번째 술일로 보통 연말을 가리키며, 속절은 한식·단오·중추와 같이 풍속에 따라 지키는 절기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삭망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을 말하는 것이지요.

산릉제례 (새창)
산릉제례
출처 : 문화재청 정릉관리소                                ☞ 바로가기


또한 왕이 직접 능에 와서 치르는 친제도 있었는데, 이를 배릉(拜陵) 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반드시 태조 건원릉 이하 부왕 및 모후의 산릉에 참배하는 것이 법도였습니다.

조상숭배 사상과 효제사상이 담겨 있는 제례는 왕족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실천한 의례였습니다. 모든 절차는 정해진 순서와 방식대로 엄격히 진행됐는데, 현재 각 왕릉에서 거행되는 산릉제례 역시 전통 방식 그대로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맞추어 거행됩니다.


>> 북한의 조선 왕릉
조선시대의 왕릉은 총 42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40기 뿐이지요. 그 이유는 나머지 2기가 남한이 아닌 북한에 있기 때문입니다.

■ 제릉(齊陵)
제릉은 태조 이성계의 첫째 부인이자 정비였던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능입니다. 북한 보존급문화재 제556호로 현재 개성시 판문군에 있습니다.

왕후는 조선 개국 1년 전인 1391년에 사망했지만, 조선 개국 다음날인 1392년 7월 17일 절비(節妃)로 추존되었고,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했습니다. 1398년 11월 둘째 아들인 정종에 의해 신의태왕후(神懿太王后)로 추존되었고, 1408년에는 다섯 번째 아들 태종에 의해 승인순성 신의왕태후(承仁順聖 神懿王后)로 시호를 높였으나, 1683년 숙종9년에 신의왕후로 다시 격하되었습니다. 그러나 1899년 12월에는 고종에 의해 황후로 격상되어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되었습니다.

■ 후릉(厚陵)
후릉은 조선2대 왕인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입니다. 개성시 판문군에 있는 후릉은 조선의 왕릉 가운데 두 개의 봉분을 난간석으로 연결한 최초의 쌍릉으로, 북한 보존급문화재 제 55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조선 2대왕 정종과 안정왕후의 무덤인 후릉 (새창)
조선 2대왕 정종과 안정왕후의 무덤인 후릉
출처 : 평화문제연구소                                                       ☞ 바로가기


정종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올랐으나, 2년 2개월 만에 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개성 인덕궁에 거주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부인이었던 정안왕후가 먼저 승하하여 후릉에 안장되었고, 그로부터 7년 뒤인 1420년에 승하한 정종 역시 같은 능호를 이어받았습니다.


※ 참고사이트·문헌
     문화재청 조선왕릉전시관 (http://royaltombs.cha.go.kr)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1 / 이우상 / 다할미디어(2009)
     王에게 가다 / 이병유 / (주)지오마케팅(2008)

>국가지식포털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한국의재발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