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서를 담은 시구, 마음을 흔들다
소월의 시는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 화자를 통해 보여주면서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노래한다. 소월의 시는 서구 편향적인 초기 한국 현대 시단 형성 과정에서 한국적인 정감과 가락의 원형질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민족시, 민중시의 전범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특징이 그를 한국 현대 시인 가운데 가장 많은 독자층을 거느리면서도 가장 많이 연구된 시인으로 만든 것이다.
소월은 1920년 18세의 나이로 스승이었던 안서 김 억의 추천으로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등을 『창조』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리고 곧 바로 「먼 후일」, 「만나려는 심사」,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죽으면」 등을 『학생계』에 발표하며 시단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선진하는 시인 중에 네 좋아하는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할 것 없이 노작 군과 소월 군을 들겠다. ……노작 군이나 소월 군이나 둘이 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아는 이다. ……거기다가 노작 군의 쎈트멘트와 소월 군의 민요적 기분은 또 다른 데서 얻기 어려운 것이다.
― 주요한, 「문예시평」, 『조선문단』 창간호, 1924년 10월
배재고보에 편입한 1922년에는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개여울」, 「달맞이」, 「가는 봄」 등과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이자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진달래꽃」을 『개벽』지에 발표하여 크게 주목을 받는다. 상기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월이 문단에 소개되자 그의 시에 대해 일부 프롤레타리아 문학파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우리말의 정서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구현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같은 평가는 당대 대표적인 문인들의 평가로서 소월은 이미 이때 민요시인, 서정시인으로 문단 내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소월의 시작 활동은 1925년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매문사)을 간행한 그해 5월 『개벽』지에 그의 시론 「시혼」을 발표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의 전 작품 127편이 수록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실린 시들은 소월이 이전에 잡지에 발표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발표 당시의 작품과 문맥상 차이가 있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 발표한 작품을 수정해서 다시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 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서구 사조의 흐름에만 매몰되어 있던 우리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키는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월의 시가 민요시라는 견해는 형태론적인 근거와 소재론적인 근거에 바탕을 둔다. 음률상 2음보, 3음보, 후장 3음보, 3·3·4조 등의 리듬을 빌렸는데, 「진달래꽃」, 「그리워」, 「산유화」 등에서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대표작 「진달래꽃」은 떠나버린 임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3·3·4조로 맞춘 율격이다.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등에는 순종의 미덕보다는 미련과 원망, 자책과 갈등이 숨어 있으며, ‘고이 보내드리우리다’에는 임은 떠났지만 끝내 체념할 수 없다는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역설적 감정은 결국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로 끝나고 있다. 소월이 활동하던 시기는 대략 1920년대이다. 즉 1919년 3·1운동 이후이기 때문에 1920년대 초반 한국 시단에는 허무, 병, 꿈, 눈물 등의 어두운 이미지가 드리워져 있었다. 특히 그가 「진달래꽃」을 썼을 때는 한국 시단에 서구 사조가 무작위적으로 범람하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소월은 민요적 율격에 우리 민족 고유의 서정을 잘 담아내어 한국적 서정시의 기틀을 공고히 다진 시인이었던 것이다.
가장 평범한 언어로 비범한 시를 짓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진달래꽃」은 이별의 슬픔을 인내하면서 임이 떠나는 길에 진달래꽃을 뿌리는 전통적인 정한의 정수를 보여준다. 소월은 마침내 이 작품에서 전통적 시가의 율격을 띠면서도 누구도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완벽한 현대시를 구현한 것이다.
소월의 시를 관류하는 한의 정조는 먼저 그의 부친이 정신이상자라는 점과 항상 그가 소외된 삶을 살았다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다가 마음에도 없는 결혼생활도 한의 생성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시가 민요의 보편적 성격인 여성적 정조를 띠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여기에 포함된 한 역시 주위의 불행한 여성들의 생활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어머니, 숙모 계희영, 외숙모, 친구 김상섭의 아내 등은 그에게 불행한 여인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지식인이 겪어야 하는 절망감과 허무의식도 한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기에 쓴 시를 보면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에서 나아가 민족의식에 눈뜬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라면」, 「돈과 밥과 맘과 들」, 그리고 「제이·엠·에쓰」 등이 그 일례에 해당한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라면」에서는 일제감정기의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 소월의 시는 그가 즐겨 차용한 단어들이 어떤 전후 문맥에 걸려 어떻게 의미들이 조절되는가를 시험해보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1925년 『개벽』지 5월 호에 발표하여 일명 ‘음영의 시학’이라고도 불리는 시론인 「시혼」에서 그는 어둡고 가냘프고 애잔하게 투영되는 시가 소중하며, 평범하고 습관적인 행위 속에서 ‘물物의 정체’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한국시사의 하나의 원형질적인 존재로 평가받고 있는 점은 가장 평범한 언어로 가장 비범한 시적 조직을 만들어 새로운 반응을 얻어냈다는 점이다.
특히 소월의 시에는 ‘해·봄·바다·밤·저녁’과 같은 시·공간을 나타내는 단어와 ‘님’이라는 주체어, 그리고 ‘그립다·가다·오다·설움·슬픔’과 같은 동작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와 같은 단어들이 인간의 삶에 가까운 것2604 진달래꽃을 보면 김소월의 시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문장의 힘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 05 김소월 시비.06이고 보면, 시인으로서 소월의 능력은 별난 시어의 선택이 아닌 별난 배합과 조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셈이다. 단어와 단어를 묶고, 행과 행을 고도의 긴장관계로 엮은 소월의 시집은 한국의 전통적인 음수율과 음보율을 밝히는 데에 가장 긴요한 운율학의 자료로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의 문장에 담긴 정한情恨의 세계
2011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서구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무작위적으로 팽배했던 시기에 우리의 정서와 민족혼을 일깨워 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문학의 자산이었던 민요적 운율의 수용과 구비문학의 시적 변용, 한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국적 서정을 순도 높게 형상화했다는 점 등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영역인 셈이다. 따라서 서구 사조를 추수하기에 급급했던 1920년대, 우리 시단에 새로운 충격파를 던지며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이끌어 냈던 것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소월의 시집은 표면에 그리움, 슬픔, 한 등 비극적 사랑의 정감이 있으면서도 이면에는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성찰로까지 이어진다. 더구나 그 심층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고자 하는 초극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소월은 한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민족시인으로 손꼽힌다. 그의 시집은 토속적이며 전통적인 정한의 세계를 순도 높은 서정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자와 평자들에게 널리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이다.
글·강희안 시인, 문학박사 사진·문화재청, 연합콘텐츠, 두피디아 포토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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