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다산 정약용
올해는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지 250주년 되는 해입니다. 다산은 방대한 저작을 남긴 학자이자 사상가였고, 수원 화성을 설계한 건축가이자 엔지니어였으며, 현실정치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관리이기도 했습니다. 또 유배지에서 가족들에게 애틋한 사랑을 전한 아버지이자 채소밭 가꾸기를 즐기는 자연인이기도 했습니다.
유네스코(UNESCO)는 “정약용은 매우 중요한 한국의 철학자로서 그의 업적과 사상은 한국 사회와 농업, 정치 구조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며 여러 방면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긴 다산의 탄생일을 유네스코 관련 기념일(6월 16일)로 지정했습니다. 조선의 문예 부흥기를 빛낸 다산 정약용에 대해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국가문화유산 종합 DB (http://www.emuseum.go.kr)'와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http://yoksa.aks.ac.kr)'의 도움을 받아 알아보겠습니다.
>> 다산 정약용의 생애
>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정약용
정약용은 1762년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윤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친가는 홍문관 관리를 8대 연속으로 배출한 집안이었고, 외가인 해남 윤씨 가문은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습니다. 정약용은 자신의 친가를 화평한 인품과 학문전통이 있는 학자 가문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보였고, 외가는 시서화의 예술적 정취가 깊이 배어 있는 가문임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한편, 정약용이 태어난 해에 사도세자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습니다.
> 정조와의 운명적 만남
1776년 정조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르고 새로운 정국이 열렸습니다. 같은 해 15살이던 정약용은 풍산 홍씨 집안의 규수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이 무렵 정약용은 매형인 이승훈, 성호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과 교유하며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세계에 뛰어듭니다. 그는 22살에 소과에 합격해 생원 자격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처음으로 정조 임금을 뵙습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중용’에 대한 질문을 내려 답을 올리게 했고, 여기서 정약용은 최고점을 받으며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훗날 재상감으로 보고 다양한 교육과 체험을 시켜주고 국가에서 편찬하는 서적을 하사해 학문에 힘쓰도록 했습니다.
> 성군을 만나 뜻을 펼치지만..
정약용은 28세에 대과에 급제해 희릉의 직장(종7품)으로 벼슬길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개혁정치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으로 옮긴 뒤 그곳에 새 도시를 건설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때 정약용은 수원화성을 설계했고, 거중기와 수레 등을 개발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또 암행어사로 백성을 괴롭히는 수령을 고발했으며, 금정찰방과 곡산부사로 일하며 목민관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개혁과 개방을 통한 부국강병을 이루려던 개혁군주와 관리의 꿈은 1800년 정조의 사망으로 좌절됐습니다. 위당 정인보는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는 말로 두 사람의 운명적인 관계를 표현했습니다.
> 18년의 유배생활과 실학의 집대성
정조가 49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후 정약용은 시련을 맞습니다. 왕위를 이은 순조는 당시 11살로 나랏일을 돌볼 수 없어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합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선 이력으로 정조 치세에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정조 사후에 권력을 잡은 세력들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되돌리고, 그의 측근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합니다. 1801년 천주교도들을 탄압한 신유박해가 그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승훈(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 이가환, 정약용 등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돼 1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400여 명이 귀양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억울하고 가혹한 귀양살이였지만 정약용은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8년 동안이나 이어진 유배생활에서 많은 학자와 편지를 나누거나 학문을 토론했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유배에서 풀려난 다음에도 여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실학을 집대성했으며, 1836년 75살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습니다.
>> 정약용을 이해하는 몇 가지 키워드
> 목민관 : 금정찰방, 곡산부사
정약용은 천주교도였다는 사실과 정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정적들의 거센 공격을 받았습니다. 정조는 정약용을 동부승지(현 청와대 수석비서관 격)에 제수해 곁에 두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곡산부사로 임명했습니다. 곡산은 지금의 황해도 북동쪽에 있는 곳으로 정약용은 2년 동안 피폐해진 민생을 돌보고, 누적된 폐단을 개선해 백성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목민심서』를 집필합니다. 정약용은 이 책에서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릴 관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백성의 생활을 평안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했습니다.
> 건축가 : 배다리와 수원화성
1789년 정조는 현륭원(사도세자의 능원)을 참배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야 하니 배다리를 놓으라는 명을 정약용에게 내립니다. 천문 기상, 수학, 물리학 등 다방면으로 지식을 축적한 정약용은 곧장 설계에 들어갑니다. 그는 배가 물결에 따라 하류 쪽으로 내려가거나 서로 부딪치지 않게 연구하고, 배와 배 사이의 간격은 얼마나 띄워야 하는지, 한강 어느 곳에 다리를 놓아야 적당한지를 꼼꼼히 따진 후 배 60척을 강물에 띄우고 2,000장이 넘는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완성했습니다. 정약용이 설계한 배다리의 모습은 정조의 ‘화성능행도’에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건축가로서 정약용의 면모는 1792년 수원화성 축조에서 빛을 발합니다. 그는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해 성의 높이나 거리 등을 측량함으로써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성을 설계했습니다. 또 일꾼들의 고단함을 덜기 위해 거중기와 수레를 개발함으로써 일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덕분에 공사기간 10년으로 시작한 화성 축조 프로젝트는 2년 8개월 만에 마무리됐습니다. 이에 정조는 ‘정약용 덕분에 시간과 물자를 절약할 수 있었다’고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힘을 합쳐 만든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 천주교 : 신자에서 배척자로..
정약용 집안의 여러 인물은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의 신자들이었습니다. 최초의 세례자로 유명한 이승훈은 매형이었고, 정약용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준 이벽은 맏형 정약현의 처남이었습니다. 신앙이 깊었던 이벽은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열어 여러 사람에게 천주교를 전파한 인물입니다. 강학회에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도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지식인이었지만 유교의 나라인 조선에서 천주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종교였습니다.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의식을 행하다 발각된 명례방(현재 명동성당 자리) 사건,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선교활동, 부모의 제사를 없애고 신주를 불태운 윤지충의 진산사건 등이 알려지자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한층 심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약용은 자신이 한때 천주교 신자였지만 여러 이유로 신앙을 버렸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나아가 천주교에 신앙에 빠졌던 옛 친구들을 고발하고 공격하기까지 했지만, 정약용에 대한 의심은 걷히지 않았고, 그는 신유박해 때 유배형을 받습니다. 강진에서는 상례, 가례 등 예학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유학의 기본인 충효에 대해 연구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일각에서는 자신을 천주교도로 보는 시선을 의식한 행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 여전히 유효한 다산의 가르침
> 공직자가 갖춰야 할 덕목과 실무안내서, 『목민심서』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고된 고동에 시달리지만, 관리들의 횡포로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백성의 삶을 지켜보는 참담한 심정을 여러 편의 시로 남겼습니다. 그의 분노는 관리들을 ‘큰 활로 쏴 죽이고’ 싶어 할 만큼이었고, 힘겨운 백성의 삶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정도’였다고 탄식합니다. 죄인의 몸으로 상황을 개선할 수 없었던 정약용은 백성을 다스리는 공직자가 갖춰야 할 덕목과 실무안내서를 정리해 놓은 목민심서를 저술합니다.
▶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논술한 '목민심서' 출처: 국가문화유산 종합 DB ☞ 바로가기 |
목민심서는 직책을 맡게 되는 ‘부임’을 첫 편에 두고, 직책을 마치는 ‘해관’을 마지막 편에 두었습니다. 앞부분에는 ‘율기’(자기관리), ‘봉공’(공직에 종사함), ‘애민’(백성을 사랑함) 이렇게 공직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제시하고, 이어 이․호․예․병․형․공으로 나뉜 행정체제에 따라 지방관이 수행해야 할 업무를 정리했습니다. 또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돌보는 ‘진황’이란 카테고리를 특별히 보강해 언급했습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첫 장에서 ‘다른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벼슬은 구해서는 안 된다’며 수령의 직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 백성이 그 해독을 입어 괴로움을 당하고, 그 재앙이 후손들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조선시대 과학수사 참고서, 『흠흠신서』
정약용은 조선시대 살인사건에 대한 조사가 허술하고, 억울한 판결로 형벌을 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이에 ‘중수무원록’을 토대로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흠흠신서를 집필합니다.
▶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흠흠신서' 일부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정약용은 수많은 살인사건 중 142건을 골라 살인의 원인과 동기에 따라 22종으로 분류하고, 각 사건의 내용, 수령의 검안, 관찰사의 판결을 낱낱이 기록했으며, 자신이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때 다루었던 사건과 유배지에서 보고 들은 사건들을 소개하며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또 매장한 시신을 다시 발굴해 사인을 밝혀내는 방법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살인에 고의성이 없으면 정상참작 해야 한다, 무죄판결이 났을 때 관련 문서도 폐기해야 한다, 인명을 다루는 사건이 의심스러우면 성급하게 결론 내려선 안 된다 등 흠흠신서는 사건 처리는 물론 법의학까지 폭넓게 다뤘습니다. 흠흠신서는 정약용 사후에 대량 인쇄되어 목민관들의 지침서로 활용됐고 조선 후기에 벌어진 각종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는데 일조했습니다.
> 부국강병을 꿈꾼 다산의 국가개혁론, 『경세유표』
학자이자 공직자였던 정약용의 기본 사상은 ‘목민관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 ‘불로소득자 없이 모든 사람이 일해야 한다.’ 등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낯설지 않을 만큼 진보적이었습니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경세치용(학문이 실제 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과 이용후생(생산의 발달을 통해 민생의 풍요를 지향한다.)을 종합한 개혁사상을 전개합니다. 임금이 생산을 늘리고 세금을 골고루 부여하면 백성은 제힘으로 잘살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국가는 농업이 발전할 수 있게 수로와 도로를 정비하고, 더불어 상업과 공업도 잘 살펴야 하며 이를 위해 세제, 군제, 관제, 과거제도 등 모든 제도를 고치고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한 책, 경세유표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44권으로 정리된 경세유표의 서문에서 다산은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국가개혁에 대한 정약용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 경세유표 본문 중 일부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 다산의 자취를 만날 수 있는 곳
>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 (전라남도 강진군)
정약용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여러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천주교에 연루됐다는 점은 사람들의 접근을 꺼리게 하였고, 자신에 대한 감시가 심해 위축됐으며, 어려운 형편으로 생활을 꾸리기도 녹록치 않았습니다. 주막집 골방에서 4년, 고성사의 보은산방에서 2년, 목리 이학래의 집에서 2년, 모두 8년을 옮겨 다닌 끝에 1808년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다산초당에 자리를 잡습니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며 후진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합니다. 당대의 사상가, 제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나누며 자신의 학문을 넓혀갔던 곳. 다산초당은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 했고, 초가집이었던 곳은 기와집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사적 제107호로 지정된 다산초당의 현판(茶山艸堂)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도 유명합니다. 다산초당에는 정석, 약천, 연지석가산, 다조 등 정약용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 다산초당의 정약용 필적, '정석(丁石)'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 다산의 생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산유물전시관’ (전라남도 강진군)
다산초당에서 남쪽으로 700m 떨어진 지점에는 다산유물전시관이 있습니다. 1999년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됐습니다. 다산의 영정, 연보, 가계도, 생애, 유물 등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시관 뒤편에는 79명이 육필로 돌에다 다산의 명언을 써서 세운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이 조성돼 있습니다. 한편,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을 지나 백련사로 가는 길은 짧은 길(2km)이지만 활엽수와 침엽수가 잘 어우러져 산책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걷고 싶은 길’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 다산유물전시관 전경 출처: 강진군 |
> 다산이 아끼던 산책로, ‘다산길’ (경기도 남양주)
정약용은 지금의 남양주시에 속한 마재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정약용은 자신의 집 앞을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배를 타고 한양과 수종사, 천진암에서 노닐거나 한강에서 낚시를 즐기고는 했습니다. 이곳은 지금 다산 유적지와 실학박물관을 잇는 길입니다. 남양주시는 정약용이 아끼던 산책로를 13개 코스에 총 길이 179.8km의 ‘다산길’로 꾸며놓았습니다. 여기에는 정약용 형제들이 천주교를 접했던 마재성지, 한강 강변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산책로, 연꽃이 시선을 끄는 연꽃마을 등 풍광을 감상하며 걷기 좋은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 관련 행사
> ‘다산, 한강(冽水)의 삶과 꿈’ (4월 27일 ~ 9월 9일, 실학박물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실학박물관에서 정약용 탄생 250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열립니다. 한강 일대는 정약용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그의 삶과 사유의 터전입니다. 특별전에서는 강진 유배 중 부인이 보내온 치마폭을 잘라 가르침의 글귀를 써서 아들에게 보낸 글을 모은 ‘하피첩’, 딸들에게 보낸 두 장의 매조도, 유배지에서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총 70여 점의 유물이 출품된 전시는 박물관 로비에 설치된 배다리를 통해 기획전시실로 들어가게 연출돼 있는 등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실학박물관은 “다산은 강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사람과 세상을 발견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다산, 한강의 삶과 꿈' 전시포스터 출처: 실학박물관 ☞ 바로가기 |
> ‘천명(天命), 다산(茶山)의 하늘’ (6월 16일 ~ 7월 22일, 예술의전당)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 전남 강진군, 단국대와 공동으로 다산 종합 전시회를 엽니다. 정약용의 친필 저술과 시․서․화 등 문예작품, 지인들과 교류했던 유물과 자료 150여 점이 출품돼 있습니다. 또 ‘목민심서’, ‘흠흠신서’, ‘중용강의보’ 등 정약용이 직접 소장했던 가장본 10여 건 3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정약용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고, 길었던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고향에서 보낸 18년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도 이번 전시의 중요한 감상 포인트입니다.
▶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 특별전 - 천명, 다산의 하늘 출처: 예술의 전당 ☞ 바로가기 |
이 밖에도 실학박물관에서는 ‘다산 사상과 21세기’라는 주제로 7월 13일부터 16일까지 3박 4일 동안 대학생 방학 실학캠프를 실시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은 10월 중 특별전시회를 기획 중이며,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노력하는 한국의 집에서는 10월 중 ‘다산 가을 음악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참고문헌 및 사이트
ㅇ 『수원 화성과 정약용』이정범, 서강북스, 2005
ㅇ 『다산의 후반생』차벽, 돌베개, 2010
ㅇ 『다산평전-백성을 사랑한 지성』금장태, 지식과 교양, 2011
ㅇ 네이버 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491
ㅇ 한겨레신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4156.html
ㅇ 공감코리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7&oid=078&aid=0000020218
ㅇ 경인일보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652850
ㅇ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206/h2012061421065386330.htm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조은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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