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것

[스크랩] 남계서원

깜보입니다 2013. 9. 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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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어 지금도 함양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그래서 생겨난 말이 '左安東,右咸陽'이다.

그 '우함양'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 조선조 5賢 중 한 사람인 일두,정여창(1450~1504)이다.정여창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공부하다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그의 문하가 되었다.1498년(연산군4)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이 화를 입자,그도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고 갑자사화때 부관참시를 당했다.

 남계서원은 1552년(명종7) 강익(1523~1567)의 주동으로 유림들과 함양군수 尹確이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고 서원 앞의 시내 이름을 따서 '남계'라는 이름으로 1566년(명종21)에 사액되었다.정유재란 때 불타고 1605년(선조38) 羅村으로 옮겨 복원했다가 1612년(광해4) 옛터인 현재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다.

  소수서원과 문헌서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건립되었다.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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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살문과 하마비를 지나면 남계서원의 정문격인 '풍영루'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이다.

누하진입토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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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은 강당인 '明誠堂'이고 동재인 '養正齋'와 서재인 '補仁齋'가 마주 보고 있고 보인재 아래에 묘정비각이 있으며 '명성당' 동쪽에 '장판각'이 있다.

  '養正齋'는 [주역]의 '산업을 바르게 기른다(蒙以養正)'의 인용이고,

  '補仁齋'는 [논어]의 '벗으로써 仁을 돕는다(以友補仁)'는 구절의 인용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2칸,측면 1칸인데 모두 한 칸은 온돌방이고 한 칸은 누마루다.

   누마루에는 '愛蓮軒'과 '영梅軒'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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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당'현판의 왼쪽에 있는 방 '居敬齋', 書院의 원장이 거처하면서 원생들의 수업을 감독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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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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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있고 들어 서면 담장을 둘러 별도의 영역을 마련한 곳에 사당이 있다.

전형적인 '前學後廟'의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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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은 정면 3칸의 맞배집으로 전면은 툇칸을 이루었고,내부에는 정여창을 주벽으로,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 앞 왼쪽에 관세대와 정료대가 설치되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전사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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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삼문 앞에서 내려다 본 '명성당'건물.멀리 보이는 들이 개평리이고 남계천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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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광주민학회
글쓴이 : 조청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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