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어 지금도 함양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그래서 생겨난 말이 '左安東,右咸陽'이다.
그 '우함양'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 조선조 5賢 중 한 사람인 일두,정여창(1450~1504)이다.정여창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공부하다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그의 문하가 되었다.1498년(연산군4)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이 화를 입자,그도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고 갑자사화때 부관참시를 당했다.
남계서원은 1552년(명종7) 강익(1523~1567)의 주동으로 유림들과 함양군수 尹確이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고 서원 앞의 시내 이름을 따서 '남계'라는 이름으로 1566년(명종21)에 사액되었다.정유재란 때 불타고 1605년(선조38) 羅村으로 옮겨 복원했다가 1612년(광해4) 옛터인 현재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다.
소수서원과 문헌서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건립되었다.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홍살문과 하마비를 지나면 남계서원의 정문격인 '풍영루'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이다.
누하진입토록 되어 있다.
정면은 강당인 '明誠堂'이고 동재인 '養正齋'와 서재인 '補仁齋'가 마주 보고 있고 보인재 아래에 묘정비각이 있으며 '명성당' 동쪽에 '장판각'이 있다.
'養正齋'는 [주역]의 '산업을 바르게 기른다(蒙以養正)'의 인용이고,
'補仁齋'는 [논어]의 '벗으로써 仁을 돕는다(以友補仁)'는 구절의 인용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2칸,측면 1칸인데 모두 한 칸은 온돌방이고 한 칸은 누마루다.
누마루에는 '愛蓮軒'과 '영梅軒'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명성당'현판의 왼쪽에 있는 방 '居敬齋', 書院의 원장이 거처하면서 원생들의 수업을 감독하던 곳
'장판각'
명성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이 있고 들어 서면 담장을 둘러 별도의 영역을 마련한 곳에 사당이 있다.
전형적인 '前學後廟'의 구조다.
사당은 정면 3칸의 맞배집으로 전면은 툇칸을 이루었고,내부에는 정여창을 주벽으로,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 앞 왼쪽에 관세대와 정료대가 설치되어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전사청이 있다.
내삼문 앞에서 내려다 본 '명성당'건물.멀리 보이는 들이 개평리이고 남계천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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