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펌)역사와 현실]책 읽는 일본을 보는 한국인의 시선

깜보입니다 2018. 6. 28. 09:06



한국 사회는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로 시달리고 있다. 만일 현재의 추세가 장기간 계속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문득 우리보다 먼저 노령화의 늪에 빠진 일본의 형편은 어떠한지 궁금했다. 마침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쓰노 가이타로의 <100세까지의 독서술>(송경원 역, 북바이북, 2017)이다. 그는 당년 80세의 노인이다. 젊어서는 연출과 편집 일에 종사했고, 나중에는 대학교수를 지냈다. 이 책에서 쓰노는 자신의 인생경험을 담담한 필치로 적었다. 

[역사와 현실]책 읽는 일본을 보는 한국인의 시선

덕분에 나는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한 폭의 풍경화처럼 감상했다. 일본이라는 멀고도 가까운 이웃 나라의 이야기를 읽는 사이, 나의 뇌리에는 이 땅의 현재와 미래가 마치 차창 밖 풍경처럼 얼핏얼핏 스쳐 지나갔다. 이 책을 읽으며 일본은 참 신기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서너 가지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면 어떨까 싶다.

첫째, 죽음에 직면한 일본 노인들의 태도가 꽤 인상적이다. 알다시피 일본 사람의 평균수명은 참 길다(여성 87세, 남성 80세).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의 공포에 짓눌리기 마련인데, 일본에는 그렇지 않은 노인들이 적지 않다. 낡은 종잇장처럼 조용히 바스라져버리는 노인들이 상당수라 한다. 

이런 일본적 현상이 앞으로는 우리 사회에서도 비교적 흔하게 목격되지 않을까. ‘죽음이란 과연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곰곰이 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도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그렇다면 담담한 마음으로 이승을 작별하는 노인이 한국 사회에도 크게 늘어나지 않을까.

둘째, 실로 많은 일본 노인들이 책을 사랑한다. 이것은 쓰노와 같은 지식인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학력과 무관하게 많은 일본인들이 평생을 독서광으로 산다. 쓰노의 말에 따르면, 책을 많이 읽는 일본인은 매일 3권씩을 꼬박꼬박 읽는다. 평생 하루 한 권씩을 읽는 사람은 무수히 많다고 한다!

특히 일본 노인들의 하루 일과는 인상적이다. 그들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그날 읽을 책을 붙들고 책상 앞에 앉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읽다가 힘이 부치면, 침상에 누운 채 책장을 계속 넘긴다.

그들은 덮어놓고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읽고, 쓰고를 되풀이한다. 일본 사회를 패전의 늪에서 구한 것이 바로 그들의 독서열이었을 것이다. 쓰노의 책을 읽으며, 나는 다소 기괴하기까지 한 그들의 독서습관이 부러웠다. 

셋째,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일본에는 무거운 장서더미에 깔려 죽을 운명에 놓이는 노인들이 많다. 일본에는 수천권의 책을 비좁은 집에 쌓아둔 사람들이 많단다. 본격적으로 평생 책을 사 모은 노인이라면, 6만권의 장서쯤은 기본이란다. 

사실상 독서인이 멸종되어버린 한국 사회와는 대조적인 풍경이다. 참고로, 한국인의 연간 평균 독서량은 10권쯤이다. 500년 동안 모두가 과거시험에 매달려 살았던 나라, 선비의 나라임을 자랑하는 우리 사회에 정작 독서인은 멸종지경이 되었다. 일본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일본은 단 한 차례의 과거시험도 실시한 적이 없는 무사의 나라였다. 그런데 현대 일본인의 책 사랑은 선비의 후예를 무색하게 만든다. 이런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없다. 

일본인의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쓰노의 책을 읽고 안 사실인데, 일본의 교양 시민들은 자기계발에만 힘을 쏟는다. 그들의 독서열풍이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촉발하는 기폭제로 작용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 그들은 날마다 가슴에 교양을 차곡차곡 쌓으며, 세상의 시름을 달랜다. 또는 개인적인 취미를 충족할 따름이다. 독서가 시민운동이나 정치투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 사무라이들이 호령하던 시대에도 그랬다. 정치란 평민과 지식인의 몫이 아니었다. 일본의 지식인은 순종적인 학인이었다. 이런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런 느낌을 결코 지울 수 없었다. 

한국의 사정은 정확히 그 반대편이 아닐까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기꺼이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한다. 독서량이 많든 적든, 한국인은 대체로 현실의 개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본사람들처럼 조용히 수동적으로 세상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의욕과 활기로 시끌벅적한 것이 우리 사회의 특징이다. 

쓰노는 과연 일본인답다. 그는 책의 어느 한 구절에서도 사회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일 양국 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말을 아꼈다. 수채화처럼 담담한 그의 회고담을 읽는 동안에도 한국과 일본 사회를 비교하기에 여념이 없는 나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럼, 일본은 끝끝내 일본이고, 한국은 한국으로 온전히 남을까. 두 나라 사회는 갈수록 비슷한 경험을 두껍게 쌓아가고 있다. 앞으로는 모든 것이 과거와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 나라에도 많은 일본사람들처럼 평생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인생의 고뇌를 삭이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수만권의 장서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늙어갈 한국인은 그럼에도 여전히 개혁적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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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272046005&code=990100#csidx67e5e3019b3ccc29715fe5a2692173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