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펌) 서 있는 사람들

깜보입니다 2019. 10. 28. 10:05

법정 스님은  우리 시대에서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시다가 

입적하신 스님이시며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수 많은 글을 

쓰신 분이시라는 것 다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제가 가진 책 중에서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의미있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법정스님의 잡문집(雜文集)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좋아하고 인상깊게 느꼈던 부분 위주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서 있는 사람들'은 제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오래된 책 중의 한 권입니다. 

생각해 보니 참 오래도록 지니고 있었네요. 여기저기 이사도 많이 다니면서 짐이 된다고

버린 책들도 참 많았는데 아직도 곁에 두고 가끔씩 꺼내보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이 책과의 인연은 참으로 깊습니다. 어떤 연유에 처음 이 책을 접하게 된지는 너무

오래 되어서 사실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처음 들어가서 1학년 때라고 생각 됩니다. 이 책을 사서 

 교양과목 시간에 읽고 있다가 친구와 잠깐 이야기 하기위해 뒤를 돌아봤을 뿐인데

그사이 누군가가 책을 가져갔답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당혹스러웠던지 지금도 생생합니다. 

시골에서 처음으로 서울로 유학 온 저에게는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라는 속담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남의 책을 가져가서 읽으면 그 마음은 편했을까요?

 마음의 양식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빠듯한 용돈에 마음만 두고 있다가 한 참 후에

다시 구매한 책으로 저에게는 참으로 의미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법정스님


이 책을 쓰신 법정스님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면


본명: 박재철

출생: 전남 해남에서 1932년 10월 8일 출생

1956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수료

1956년: 효봉스님을 은사로 통영 미래사에서 출가

1959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승려 자운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음

1959년: 해인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

1959년 이후 쌍계사, 해인사, 송광사들 여러 선원에서 안거하셨고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송광사에서 여러 직책을 맡으셨음

1970년: 송광사 뒷산에서 불일암을 직접 지어 무소유를 실천하시면서 혼자 수행하심

1994년: '맑고 향기롭게'라는 시민 단체를 만드심

1996년: 서울에 있는 대원각을 시주받아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직을 맡으심

2003년: 길상사 회주직에서 물러나셔서 강원도 산골에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시던 중 폐암이 발생하여 3~4년간 투병 생활을 하심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4세, 즉 우리나이 74세로 입적하심

저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무소유>를 비롯하여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텅빈 충만> <불타 석가모니> <영혼의 모음> 등 다수

너무 많아서 이 정도만 쓰겠습니다.


법정 스님은 책 머리에서 이 글의 제목을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붙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0년대 이후 붐비는 차 안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계층에서 

제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똑 같은 자격으로

차를 탔어도 앉을 자리가 없어 자신의 두 다리로 선 채 끝없이 실려가고 있는 것이다.

서 있는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이 아니다. 

......

이 시대의 풍속권 안에서 함께 앓고 있는 선량한 시민이다.

......

그들의 체질은 유달라, 이웃이 겪는 고통을 모른체하지 않고 같이 신음하면서 앓는다. 

앉은 자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차마 앉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법정스님은 서문에서 <서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선량한 이웃들이며

이들이 저마다 제자리에 앉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으로 붙이셨다고 합니다.


이 책의 차례는 총 5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산거집(山居集), 독감시대(毒感時代), 다래헌한담(茶來軒閑談),

 비(悲), 출세간(出世間)


 

 


 




산거집(山居集) 


어지러운 시대에서 잃은 것들이 더 많은 우리에게 

자연의 소중함과 파괴되어 가는 자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도 하고,

'먹이는 간단 명료하게'라는 산승의 생활에 대한 홀가분하게 

사는 스님의 청빈함도 느낄 수 있습니다.


물질만능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는  

'차나 마시고 가게'에서 나온 한 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차를 마실 때는 객이 많으면 수선스럽고, 수선스러우면 그윽한 정취가 없어지느니라

 홀로 마시면 싱그럽고 둘이 마시면 한적하다. 서넛이 마시면 재미있고  대여섯이

마시면 덤덤하며 7, 8인이 마시면 나눠먹이와 같더라' -옛 사람의 글에 실린 말씀


걸어가다 보면 보이는 곳마다 카페이름이 즐비하고, 들여다보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앉아 떠들썩하게 웃고 즐겨야만 차 맛이 나는 세상, 그 무리 속에 있는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의 시간도 가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나오는 '도둑과 선(禪)에 나오는

중국 송나라 때의 선승 법연(法演)이 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도둑이 죽을 날이 다가오자 도둑의 비법을 아들에게 전해 주고 싶어했다. 

아들을 데리고 밤이슬을 마시러 나갔다. 

담장을 넘어 고방으로 가서 고방에 있는 뒤주에 아들을 들여보낸 후 

문을 닫고 자물쇠로 채우고  "도둑이야!"라고 소리를 외친 후 달아나 버렸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분풀이를 

하기 위해 궁리를 내어 도망쳐 나왔다. 

집에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원망의 소리를 하려고 하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너도 네 계책으로 도망쳐오는 걸 보니 이제는이 아비의 업을

이어받을 만하구나."


법연스님은 이 이야기를 가지고 선(禪)을 말하고자 하였다. 


즉, 선이란 밖에서 얻어들은 지식이나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인식이 아니라

직관적인 파악, 철저한 자기 응시(凝視)를 통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무한한 창조력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즉, 선은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들이 생기면

해결책을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으려고 애쓴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깨우치게 되는 어떤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모든 문제들을 밖에서 찾아 헤매이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 자신에게서

찾아야한다는 것을...




독감시대(毒感時代)

 

제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차분히 홀로 있는

시간의 필요성과 각박해져가는 세상에 대한 스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도 있고, '무관심'과 '말하기 귀찮음'으로 인해 우리를 멍들게 하는 시민의식에 

대한 법정스님의 지적도 엿볼 수 있습니다. 


'파장'에서

 시골장터는 포근한 정서와 우리가 아직도 백의민족임을 

확인하게 되는 곳이다. 시골장터의 야바위꾼에 대항하는 힘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수룩하고 무력한 듯한 겁쟁이도 

인내의 극에 달하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필사적인 항거를 하게 된다.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시골 장터조차도 스님의 관찰력은

 일상 속에서도 불의에 항거하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찾아내십니다.


'우리 시대의 추하게 하는 것들'에서는 

근대화 시대에 '인간 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인간화의 선행의 필요성을 언급하시면서

 공허한 지식이 아니라 인격화된 지혜만이 올바른

가치관을 식별하고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이란 지혜로까지 심화되어져야 지식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말씀하신 스님의 깊은 성찰은 오늘날 지식

채우기에 급급한 우리도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에서 또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한평생 수학을 좋아해서 그것만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수학자가 

가끔 동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이다.


"자네는 지겹지도 않아서 평생을 두고 수학만을 그렇게 연구하는가? 

자네가 하고 있는 그 일이 인류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때마다 그 수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고 한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피면 그만이지, 제비꽃이 핌으로써 봄의 들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그건 제비꽃으로선 알 바가 아니라네." 


오늘날 우리들은 자기 빛깔을 지니고 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대중 매체에 의해 획일화된 속물이 되어가고 자기 신념도 갖기 어려운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제비꽃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에

아직까지 희망은 있어보입니다.

 





다래헌한담(茶來軒閑談)


'나무 아래에 서면'에서

 수목이 지니는 그 질서와 겸허한 자연에의 순응을 보고 

부끄러워진다는 법정스님의 겸허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을 정복하기 보다는 자연으로부터 그 질서와 겸허와 

미덕을 배우기를 바라는 스님의 마음을 우리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눈과 마음'

다음 구절이 마음에 닿아서 적어봅니다.


보긴 눈으로 보는데 판단은 마음으로 하고 있다. 

보고 또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똑같이 눈으로 보는데 어떤 마음에는 들고 어떤 마음에는

스쳐 지나간다. 그러고 보면 눈은 한낱 거울 같은 거에 지나지 않는다.

......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의 눈이다.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번들거리는 저 탐욕의 눈에서 우리는 그 마음의 명암을 읽을 수 있다. 

탐욕의 안개가 스스로의 시야(視野)를 차단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도수 높은

안경을 쓸 것이 아니라,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빈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직관력이란 시력 얼마의 그 육안으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는 것. 그것은 일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텅 빈, 그래서 투명해진

마음의 눈이다. 눈과 안목의 차이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눈에만 의지하고 눈앞에 드러난 물량의 형태와

상승하려는 곡선에만 최대의 관심을 기울려서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하시는 말씀이 제게도 전해옵니다. 

그런데 허심탄회한 빈 마음은 아직 찾지 못했네요. 




비(悲)


'불교의 구원관'


법정스님은 구원을 낡으면서도 항상 새로운 종교의 본질로 보셨습니다. 


종교의 기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구원의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갖가지 모순과 갈등 속에 내던져지고

외부의 부조리와 갈등 뿐만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도 모순을 지니게 된다.

이런 조건들이 인간을 부자유하게 만들며 이 부자유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인간의 원천적인 요구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자유의 길'인 동시에

생명의 발아현상이다. 자유는 인간 의지의 원초적인 바탕이며 구경(究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곧 자유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리는데 있다.


초기 불교에서는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 제1과제였다.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에 있다고 생각, 그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눈을, 

지혜의 눈을 뜬다. 즉 깨달음은 곧 개안(開眼)을 의미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그 실천 덕목을 정견(正見)으로 시작해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각성이다.


불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연기사상(緣起思想)은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를 말한 것.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


초기 불교의 실천덕목이 정견(正見)으로 시작된 것과는 달리

대승불교이 실천덕목은 주는 일(布施)로부터 시작한다.

주는 일은 타인과의 관계, 즉 실천적인 성격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타가 우리를 해탈시켜주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스스로 벗어버리는 것이다.

불타(선각자)는 다만 그 길을 가리키고 있을 뿐, 그러기 때문에 

그는 길도 생명도 아니고 하나의 길잡이이다.


대승불교의 윤리로 '비(悲)'를 든다. 

'비'는 산스크리트어 카루나에서 온 말로

'신음하다' '연민하다'의 뜻.

카루나(悲)는 타인의 괴로움을 보고 견딜 수 없는 심성이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아집에서 벗어난 인간의 본성(本性)이다.

즉 대승불교에서 해탈의 길은 곧 자비의 실천에 있다.


법정스님은 말씀하십니다. '해탈의 길은 안이한 유희가 아니라 피나는

가시밭길이다. 그 길은 고귀한 길이며 생명을 여는 막중한 길이다.'


옛날에 '서 있는 사람들'을 읽었을 때는 이해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지금도 다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떻게 살아가야 올바른 길인지를 조금씩 알아갈 뿐입니다.



 


출세간(出世間)


'출가'

출가(出家)란 버리고 떠남이다. 묵은 집, 집착의 집, 갈등의 집에서 

떠났다고 해서 출가라고 이름한 것이라 한다. 

출가란 소극적인 도피가 아니라 적극적인 추구요 끝없는 생명의 발현이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말씀하신다.

출가의 본질적인 의미가 반드시 머리 깎고 수도승이 되는데 있는 것만은 아니다.

자기답게 살려는 사람이 자기답게 살고 있을 때는 감사와 환희로 충만해 있지만,

그러지 못할 때 괴로워한다.

. 일상이 안이해지거나 무력해질 때, 이게 아닌데 싶으면

지녔던 것들을 선뜻 버리는 일들을 해야 한다. 

 본질적인 출가는 비본래적인 자기로부터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가는데

그 의미가 있다

버리고 떠남으로써 거듭거듭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가지를 떠난 나뭇잎이 뿌리로 돌아가 새 움을 틔우듯이.


나는 얼마나 본질적인 자기로 돌아가기 위해 버리고 떠나기를 

얼마나 연습하고 있었는지 내 자신에게 되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좋은 책을 나는 옆에다 두고 소중히 간직하기만 했지 

그 책 속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다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알려고 시작하는 것도 희망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법정스님의 글은 산업화와 물질만능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아주  작은 사물이나 자연에서도 

예리한 관찰력과 통찰력으로 그 존재의미를 찾아냅니다.

지식이 경험화된 지혜의 안목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좋은 글귀들이 있는데 다 싣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법정스님의 '서 있는 사람들'에 들어있는 내용 중에 일부만 

생각나는 대로 느낀대로 적어 보았습니다. 

쓰고 싶은 내용들이 너무 많은데 다 올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법정 스님의 책 들은 더 이상 출판되지 않아서 더 이상 

구매할 수 없지만 다행히도 제게는  법정 스님의 책이 제 몇 권 더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웃의 고통을 모른체하지 않고 같이 신음하면서 앓고 있는, 차마 앉을 수

없는 수 많은 서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아직도 밝게 빛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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