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의상대사가 터 잡은 ‘최고의 선경’

깜보입니다 2008. 4. 24. 17:11
[하늘이 감춘 땅] 금수산 정방사 
아린 발길 드센 산세…밤새 부딪혀 손 안에 잦아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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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깨끗한 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곳, 깨끗한 곳을 찾아 순례를 떠나곤 합니다. 충북 제천을 찾는 많은 사람들도 “이곳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다”는 입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충북 제천 청풍호반에 돌아드니 만개한 벚꽃 저편으로 금수산 선경이 펼쳐졌습니다. 어찌 하늘이 수만리 창공에만 있다고 할 것입니까. 이 금수강산보다 더 아름다운 천상이 있을까요. 청풍(淸風·맑은 바람)을 쏘이며 달리다 수산면 능강리에서 산자락으로 접어들었습니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얼음골의 선선한 바람이 이른 더위를 단박에 날렸습니다.

 

골짜기도 다해 길 끝나는 곳에서 돌계단을 오르니 갑자기 궁궐만한 암벽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의상대입니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던진 지팡이가 와서 멈춘 바위라고 합니다. 의상의 제자가 스승의 지팡이를 따라와 지었다는 정방사 터는 암벽의 외호 아래 앉아 있습니다. 절 뒤로 돌아 암벽 틈새에서 솟구치는 샘물 한 모금에 마음 또한 새처럼 금수산 구름 위로 가볍게 날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암벽을 등삼고 돌아서니, 이번엔 비단에 수를 놓은 듯 겹겹이 둘러싼 산들의 골짜기에 청풍호수가 연못이나 실개천마냥 흐르고 있었습니다.

 

 

고통과 근심 쫓으려 찾아오는 맑고 아름다운 곳

 

20여 년 전 우리나라 산이란 산, 절이란 절은 거의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걸어서 만행을 해본 뒤 이곳을 ‘최고의 선경’으로 꼽았던 한 스님의 말을 되새기며 정방사 관세음보살상 옆 바위 위에 앉아 산천을 바라보니, 과연 선경이었습니다. 청풍호 주변을 오고가는 구름에 따라 변화되는 산색에 취해 주지 석구 스님에게 인사를 드린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너무 빼어나서 범접하기 어려운 날카로운 산세마저 품에 안을만한 안온한 인상의 주지스님이 절을 안내해주었습니다. 절 가운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과 나한들을 모신 나한전,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 산신을 모신 산신전 등 전각들 하나하나의 기운이 남달랐습니다. 특히 지장전엔 암벽에 그대로 지장보살이 음각돼 있었습니다. 한 중생도 남김없이 지옥문을 나가게 한 뒤 자신은 가장 마지막까지 지옥을 지키고 있겠다는  지장보살이 어찌 지옥이 아니라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요. 이곳이 바로 천상 극락을 그리며 고통을 벗어나고자하는 중생들의 아픈 발길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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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사를 찾는 사람 중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기도객들이 많습니다. 정방사를 찾는 기도객들에게 밥을 해주는 공양주보살 정수월씨도 그런 기도객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공양간에서 이규호 피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어쩌면 내 막내아들과 이리도 닮았을꼬? 막내도 살았으면 곧 장가들 나인데…”라며 몰래 눈가의 물기를 훔쳤습니다. 겸연쩍어 하는 그의 웃음 뒤에 배어 있는 중생의 아픔이 청풍호반에서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정방사는 10여 년 전만 해도 찻길이 없어 한 시간은 걸어야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 꼴을 볼 수 없었던 그 시절 주지로 부임한 석구 스님은 초기엔 홀로 이 절을 지켰습니다. 인근 단양의 사찰에서 틈만 나면 정방사에 올라와 한두 시간이라도 기도하고 가야 힘이 난다는 혜은 스님이 “석구 스님은 오랫동안 지장기도를 정성껏 해온 분”이라고 귀띔했습니다.

 

힘센 산 기운에 잠 못드는 밤…토신들에 이끌려 밤새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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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사는 화강암 덩어리 위에 있는데다 의상대 바위 아래 자리하고 있어서 산기운에 센 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기도해본 사람들은 “정방사에선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토신들이 잠을 자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을 자고 있으면 바람이 문이 열리든, 모든 소리가 들리든 깨어 별 수 없이 밤새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명산의 산기운과 그 기도로 얻은 힘을 어디에 다 쓰느냐”는 물음에 석구 스님은 “혼자 다 가져서 뭐할 거요. 다 도로 나눠 줘야지요”라고 답했습니다.  

 

그가 말기 암 환자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돕는 능행 스님을 비롯해 뜻있는 일을 하는 이들을 남모르게 돕고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장보살의 마음을 담은 주지 스님의 뒤로 정(淨·맑을 정)과 방(芳·아름다울 방)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땅을 찾아 방방곡곡을 뒤지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온갖 마음을 지고, 이고 온 얼굴은 천상 같은 정방사에서도 근심의 그림자가 그대로였습니다. 정방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해우소(解憂所·근심을 푸는 집)가 있고, 대변을 보는 칸엔 ‘큰 근심’, 소변을 보는 칸엔 ‘작은 근심’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큰 근심’을 푸는 곳에 들어가니, ‘마음의 살림살이’란 글이 걸려 있었습니다.

남의 허물은 내 허물처럼 덮어주고,

내 허물은 남의 허물처럼 파서 뒤집는 마음을 연습하라

남의 허물이 보이면, 그것이 곧 나의 허물인줄 알아라.

상대를 부처님으로 보는 마음을 연습하라.

누가 뭐라든 “예”하는 긍정적인 마음을 연습하라.

누구를 만나든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라.

올라오는 마음을 부처님께 바치는 마음을 연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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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습을 하면 큰 근심이 어디에 머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 어디에 깃들까요.

 

이처럼 마음에서 큰 근심을 풀지 못하고, 오직 밖으로만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찾는 기도객들에게 경치가 아니라 마음을 보여주려는 것일까요. 법당의 주련이 보려야 볼 수 없고, 보여주려야 보여줄 수 없는 고승의 마음을 속삭임처럼 전해주었습니다.

산중하소유(山中何所有·산중에 무엇이 있을까)

영상다백운(嶺上多白雲·산마루에 흰 구름 많이 머물러 있구나)

지가자이열(只可自怡悅·다만 나 홀로 즐길 수 있을 뿐)

불감지증군(不堪持贈君·그대에게까지 바칠 수가 없구나)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