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崇禮門)’ 3字는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69)어렸을 때의 친필로 그 필치가 매우 웅경(雄勁)하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액판(額板)을 분실했는데 선조(宣祖) 꿈에 남대문 근처 내[川]에서 항룡이 승천하는 지라 王은 괴히 여겨 그곳을 수색케 했더니 숭례문 액판이 있어 다시 걸었다고 한다.
이 글자 한 자의 크기가 가로 60cm, 세로 70cm이다.
⌜지덕지(至德誌):조선 태종때 양녕대군의 사적을 기록한 책⌟에는 “임진왜란 때 이 액판을 잃었는데 광해조에 이르러 청파역의 주교 도랑에서 밤마다 서광이 있어 캐보니 이 액판이었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숭례문 대성전의 액자에 대한 변증설’ 에서는 숭례문의 편액이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는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이 쓴 것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숭례문(崇禮門)과 대성전(大成殿)의 액자(額字)에 대한 변증설
우리나라 궁전(宮殿)에 씌어진 액자(額字)들은 누구의 글씨인줄 전혀 모르는데,
도성(都城)의 남대문(南大門)에 숭례문(崇禮門)이라는 이름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讓寧大君)
[휘(諱)는 제(衤是), 태종(太宗)의 장자(長子)인데 처음에는 세자(世子)에 봉해졌다가, 태종 18년(1418)에 덕(德)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대군(大君)에 강봉(降封)되었고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그는 실상 왕위(王位)에 오르지 않으려고 거짓 미친 체하여 면한 것이다.]
의 글씨라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왜적들이 그 액자를 떼어 버려 유실되었는데, 왜란이 평정된 후 남문(南門) 밖의 못[池]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光線)을 내쏘므로 그곳을 발굴하여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
[서림총화(書林叢話)]를 상고하건데, “명 목종(明 穆宗) 융경(隆慶) 원년(1567)은 곧 우리나라 명종(明宗) 22년이다. 이해에 우리나라에 온 명 나라 사신 허국(許國)이 유심(兪深)에게 ‘이곳에 있는 액자들은 모두 보잘 것이 없고 숭례문(崇禮門) 액자가 조금 쓸 만하나 이것 역시 아주 좋은 것은 못 되고, 오직 홍화문(弘化門)과 대성전(大成殿)의 액자가 가장 좋은 글씨인데, 그 중에도 대성전 액자가 더욱 좋다.’하자 원접사(遠接使)가 그 말을 듣고 대성전 세 글자를 모사해 주었다.
대성전 액자는 곧 성임(成任)의 글씨이다
[성임의 자는 중경(重卿), 호는 안재(安齋)이고 벼슬은 이조판서에 이르렀는데, 촉체(蜀體)를 잘 썼다. 황화집(皇華集)을 상고하건데,
“우리나라 문묘(文廟)에 걸려 있는 대성전(大成殿)이란 액자의 성(成)자를 안평대군(安平大君) <호는 비해당(匪懈堂), 휘(諱)는 용(瑢)이고 자는 청지(淸之)이다. 세종(世宗)의 3째 아들로 계유정란(癸酉靖亂) 때 화를 입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었고,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이 맨 처음 성(聖)자로 써서 걸었는데, 단종(端宗) 원년(1452)에 명 나라 사신 진순(陳純), 이관(李寬)이 성균관(成均館)에 가서 알성(謁聖)하고 나서 대성전(大聖殿)으로 되어 있는 편액(扁額)을 보고 웃으면서 ‘우리 중국과는 다르다’ 하였으므로, 그 후에 대성전(大成殿)로 고쳤다”하였는데, 뒤에 고쳐서 쓴 사람이 바로 성안재(成安齋)이다.]하였다.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다.
[정난종의 자는 국형(國馨),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고, 시호는 익혜(翼惠)인데, 동래(東萊)인이다. 촉체(蜀體)를 잘 썼다.]
그렇다면 국초(國初)에 걸었던 편액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양녕대군이 어째서 다시 썼단 말인가? 난리가 평정된 후 괴이한 광선으로 인하여 다시 찾아 걸었다고 하였으니, 정공(鄭公)은 또 어떻게 해서 그를 써서 걸었단 말인가? 하물며 정공은 세조(世祖) 때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비판(碑版)이나 종명(鐘銘)을 어명(御命)에 의해 많이 썼으니, 숭례문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체(字體)를 보아도 바로 그의 서체(書體)임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때에 왜노(倭奴)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찾아 걸게 됨으로써,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와전된 데다 괴이한 광선에 대한 설(說) 까지 다시 부회(傅會)된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좋은 글씨가 땅 속에 묻히면 괴이한 광선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여전인(余全人)의 말에 ‘宋 나라 말엽에 남쪽으로 행행(行幸)할 적에 순화각첩(淳化閣帖)을 천주(泉州)에 버림으로써 이미 땅 속에 묻혀져 버렸는데, 거기서 가끔 괴이한 광선을 내쏘므로 파 보니, 이것이 바로 마제진적(馬蹄眞跡) [천주(泉州)에 있는 순화각법첨(淳化閣法帖)의 별칭이다. ‘민소기(閩小記)’에 “ 宋나라 말기에 남쪽으로 행행할 때에 이 순화각법첨을 천주에 남겨두었다가 이윽고 석각(夕刻)하여 못[池] 가운데 묻어 놓았는데, 오랜 뒤에 그곳에서 가끔 괴이한 빛이 나서 말[馬]이 그 빛을 보고 놀라므로 파 보니 곧 이 순화각법첨이었다”하였다.]이요 은정(銀정)의 흔적이었다’고 한 예와 같은 것이다.
정공이 쓴 숭례문의 편액도 명필(名筆)이고 보면, 땅에 묻혀서 광선을 발사하는 것이 무어 이상할 게 있겠는가?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 민족문화추진회
지덕지(至德誌)
조선 태종 때 양녕대군의 사적을 기록한 책(목판본. 5궝 2책. 장서각도서)이다
고종 13(1876) 이극선(李克善)이 자료를 수집해 전남 추성(秋城) 몽한각(蒙漢閣)에서 처음 간행하고, 1911년 윤봉조(尹鳳朝)가 중간했다.
태종의 맏아들로 태종 4(1404)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품행이 방정하지 못해 태종 18(1418)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된 양년대군의 사적을 모은 책이다.
권1은 세년보편상(世年譜編上)에 선향연혁(璿鄕沿革), 세보초(世譜鈔), 세년보편下에 연보략(年譜略),
권2는 실적보유(實蹟補遺)에 시(詩), 문(文), 행장(行狀), 묘지명 등
권3은 사실집록(事實輯錄)에 제가설(諸家說),
권4는 설문포췌(說文褒.禾卒)
권5는 사원휘재(祠院彙載) 상(上)의 지덕사사적(至德祠事蹟), 영언수록(零言隨錄)등을 수록했다.
태종대왕과 친인척 3-2. 195-199쪽. 지두환. 역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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