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나의 고백, 자화상

깜보입니다 2011. 11. 19. 18:54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세상에 말을 겁니다. 그들은 슬픔을 담고, 분노를 정화시키며, 기쁨을 노래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작품을 사람들에게 띄웁니다. 한 명의 예술가가 빚어낸 작품에는 그의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작품으로 자기표현을 하는 예술가들이지만, 때로는 스스로를 작품화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생애나 생활체험을 소재로 하여 쓴 자전소설이나 스스로 그린 초상화가 그런 사례가 되겠죠. 한편,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작품에 대한 관심은 곧잘 창작자에게 옮겨가는데 예술 작품을 태어나게 한 사람이자, 작품자체가 된 화가의 모습은 어떨까요?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장서각소장국학자료(http://yoksa.aks.ac.kr)의 도움을 받아 자화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자화상 : 화가의 자문자답

자화상은 화가가 자신을 모델로 삼아 그린 초상화입니다. 이는 화가가 세상을 보는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을 때, 즉 자신이 인식하는 자아라는 차원에서 예술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장르입니다. 르네상스와 근대에 걸쳐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발달하면서 렘브란트, 반 고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꾸준히 그려왔습니다.

 강세황 초상화
  강세황 초상화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김시습, 윤두서, 강세황 등의 자화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상화가 많이 그려진 것에 비해 자화상은 드문 편입니다. 이는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을 파고드는 자화상의 장르적 특성이 동양의 초상화가 지니는 의미와 거리가 있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자화상은 단순히 화가의 얼굴을 확인하는 작품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병적인 자신의 모습을, 또 다른 이는 자신이 지향하는 인물상을, 혹자는 실제보다 미화된 스스로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처럼 자화상은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드러내는 수단인 동시에 자신의 세계관을 응축하고, 지난 삶을 서술하는 장르입니다.

>> 서양의 화가와 자화상

- 자화상의 의미와 가치를 확실히 보여준, 알브레히트 뒤러 (독일, 1471~1528)

뒤러는 독일 르네상스의 여명기에 서 있던 화가로, 아직 중세에 머물러 있던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북구 양식의 인체비례, 합리적 공간표현을 습득했습니다. 뒤러는 회화, 드로잉, 판화, 자화상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독일 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뒤러의 자화상
뒤러의 자화상




1484년작 자화상은 서양회화 사상 최연소 자화상으로 13살의 뒤러가 종이에 연필로 그린 드로잉입니다. 1493년작 자화상은 22살의 뒤러가 집안끼리 정혼한 약혼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린 것입니다. 여기서는 자신의 모습을 미화시켜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도록 과장한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림의 한 구석에 잠시 출현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표현의 주체인 화가가 동시에 표현의 대상이 된 뒤러의 자화상은 서양 미술사 최초의 독립 자화상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29살의 뒤러는 ‘1500년의 자화상’에서 자신을 예수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화가로서 작품을 만드는 자신의 능력이, 세상을 창조한 예수만큼 위대하다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화가의 창작 행위가 지닌 위대한 능력을 인정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자신의 생각을 자화상으로 보여준 뒤러. 그는 36살에 파격적인 전신 누드 자화상을 그립니다.

유럽 전역에서 인정받는 화가로 명성을 쌓은 그였지만, 고국인 독일에서 화가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뒤러는 정계에 입문해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됐고, 이후 제국회의에 파견되어 외교 전문가로도 활약했습니다. 뒤러는 죽은 후에도 명성을 유지했습니다. 1840년에는 뒤러 동상이 뉘른베르크에 세워졌고, 그 주변 이름이 ‘알브레히트 뒤러 광장’으로 바뀌었습니다.

- 붓을 든 여전사,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이탈리아, 1593~1656?)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입니다. 당시에는 여성에게 미술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남동생들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운 딸을 위해 자신의 친구 아고스티노 타시를 그림선생으로 고용합니다. 하지만 타시는 17살이던 아르테미시아를 1년 가까이 강간합니다. 이 사실을 알아챈 오라치오는 타시를 고소합니다. 재판을 받는 동안 아르테미시아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당했음을 입증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심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습니다. 타시는 8개월간의 감옥살이를 하지만 곧 풀려납니다. 강간이라는 성폭력, 그리고 이를 입증해야만 불합리한 법정 싸움은 아르테미시아에게 겹겹의 상처를 안깁니다.

아르테미시아의 자화상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자화상   출처 : 네이버 미술검색



아르테미시아는 역사나 신화에 있어 주로 여성이 주인공인 주제를 다뤘습니다.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구약성서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으로 3점을 그렸습니다. 카라바조의 유디트가 겁에 질린 예쁜 여성이라면,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강렬한 힘으로 적장을 완전히 제압하는 여전사입니다. 그림이 발표된 이후 그녀를 지지하는 동료화가들은 “타시를 제대로 징벌하는 통쾌한 그림”으로 평가습니다.

아르테미시아는 ‘류트를 연주하는 자화상’,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 등의 자화상을 남깁니다. ‘류트를 연주하는 자화상’에서 아르테미시아는 화폭 너머 관객들을 빤히 쏘아보고 있습니다. 반면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에서 아르테미시아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스스로를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자화상을 통해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분노를 화가로서 극복해가는 아르테미시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한편, 여성의 창조성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사회분위기 속에 아르테미시아의 작품 중 상당수는 아버지의 작품으로 발표되곤 했습니다. 성희롱과 강간을 당한 여성이자, 재능 있는 화가였던 아르테미시아는 20세기 들어 재평가 되었습니다.
 

- 죽음 가까이서 죽음을 숙고한, 에드바르 뭉크 (노르웨이, 1863~1944)

‘절규’로 유명한 화가 뭉크에게 죽음은 그의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뭉크는 다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의고, 열네 살에 누나를 저 세상을 보냅니다. 가족의 죽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버지와 남동생도 떠나보냅니다. 뭉크는 오남매 중 누이동생을 뺀 모든 혈육의 죽음을 살아서 겪습니다. 더불어 뭉크 본인은 악몽, 불면증, 류마티즘에 시달리며 병치레를 했습니다. 이런 성장환경 속에서 뭉크는 죽음을 원하고, 두려워하며, 상상했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나의 옆에 서 있었다”고 고백할 만큼 뭉크에게 죽음은 가까운 공포이자 불안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뭉크의 인식은 화폭에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뭉크의 자화상



‘저승에서, 자화상’은 뭉크가 저승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것입니다.  뭉크의 상상 속에서 저승은 주황색 불길에 휩싸여 있습니다. 저승의 열기는 누드 상반신으로 표현된 뭉크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습니다. 사선으로 구성된 이 그림의 왼쪽에는 검은 그림자가 자리 잡고 있는데, 육체를 잃은 영혼이 저승으로 스며드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뭉크는 저승이 배경인 캔버스 안에서 또렷한 시선을 이편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또 생의 끈을 놓은 뭉크의 육신은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여러 번 목격한 뭉크가 죽음에 맞서려는 의지를 담아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숙고한 화가 뭉크는 81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저승에서의 자화상
저승에서, 자화상


뭉크는 죽음과 불안, 사랑과 고통 같은 주제를 색채의 성질과 추상적 형상에 담아 시각화 했습니다. 뭉크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 그림을 계속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뭉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많은 작품은 모두 오슬로시에 기증되었습니다.
뭉크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던 1963년 오슬로시는 ‘뭉크미술관’을 개관해 그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고독한 영혼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이탈리아, 1884~1920)

36살에 요절한 모딜리아니는 사후에 명성을 인정받은 화가입니다. 모딜리아니는 자화상을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1919년에 그린 ‘자화상’은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기 전에 남긴 작품입니다. 캔버스 안의 모딜리아니는 오른손에 팔레트를 잡고, 왼손에 붓을 들고 있습니다. 왼손잡이 같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을 옮겨놓았기 때문입니다. 모딜리아니의 매끈한 얼굴 속에 까맣게 뚫린 눈은 어딜 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생활고와 쇠약한 자신의 건강 때문에 미래가 불투명한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됩니다. 동시에 눈동자 없는 눈은 모딜리아니 그림의 특징으로, 조각을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표현법으로 추정됩니다. 이밖에도 꼭 다문 입, 왜곡된 코, 길게 늘어진 목으로 묘사된 표정 역시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 자화상
 모딜리아니 자화상




모딜리아니는 일생에 단 한 번 개인전을 열었고,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그림을 레스토랑에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고, 작품 가격은 500배 이상 뛰었습니다. 또한 그의 짧은 일생은 3편의 영화, 1편 다큐멘터리, 9개의 소설과 연극으로 다뤄졌습니다.

>> 우리나라의 화가와 자화상

- 정면을 응시하는 압도적인 시선, 공재 윤두서 (조선, 1668~1715)

윤두서는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입니다. 숙종 19년에 과거에 합격했지만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해 학문과 시서화로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국보 제240호로 지정된 그의 ‘자화상’은 우리나라 초상화 중 대표작입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얼굴만 그린 것인데 상투 위와 수염 아래쪽은 모두 생략하고 얼굴만 부상시킨 파격적인 구도를 취했습니다. 윤두서의 친구는 이 자화상에 한 편의 시를 부칩니다.

윤두서 자화상
윤두서의 자화상
출처 : 독립기념관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긴 수염 길게 나부끼고 얼굴은 기름지고 붉으니
바라보는 자는 신선이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저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기품은
대개 또한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구나.

- 이하곤 <윤효언자사소진찬>

윤두서는 독학으로 그림의 세계에 들어설 만큼 그림에 심취했지만 그는 실학을 연구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실학자로서 윤두서는 ‘짚신 삼기’와 ‘나물 캐기’ 등의 그림에서 서민을 화폭의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오래도록 그림의 주인공은 선비였고, 서민은 조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윤두서의 속화는 이 틀을 흔든 것으로 회화사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부분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데생력을 겸비한 윤두서는 인물화와 말 그림에 있어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마굿간에 서서 종일토록 말을 관찰한 다음에야 붓을 들었고, 작은 부분까지 정확하게 그렸습니다. ‘노승도’, ‘심득경 초상’, ‘주마상춘도’, ‘낙마도’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윤두서가 남긴 60여 점의 그림은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 ‘여자도 사람이외다!’ 나혜석 (조선, 한국 1896~1949)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소설가로도 활약했습니다.

나혜석은 동경유학생활에서 만난 최승구와 연인이 되었는데, 1916년 첫사랑 최승구가 폐병으로 죽고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1918년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나혜석은 함흥의 여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유학생 출신인 김우영과 결혼합니다. 당시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결혼조건으로 4가지 약속을 받아냅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 줄 것. 6년간의 구애 끝에 나혜석과의 결혼을 앞둔 김우영은 이런 요구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입니다.

나혜석 자화상
나혜석의 자화상



파격적인 조건과 결혼으로 두 사람은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습니다. 나혜석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집을 비웠다는 이유로, 그녀의 재능을 아끼고 감싸는 김우영은 졸장부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두 사람은 1927년 세계 여행에 나섭니다. 여행길에서 만난 천도교 지도자 최린은 나혜석의 삶을 흔들어 놓습니다. 남편이 독일로 공부하러 간 동안 깊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프랑스를 비롯해 바다 건너 고국에까지 소문이 납니다. 결국 나혜석과 김우영 두 사람은 부부로서 연을 끊게 됩니다. 이혼이 드물던 1932년 나혜석은 ‘이혼녀’가 됩니다.
 
이후 나혜석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재결합을 원했지만 김우영은 이를 거부합니다. 김우영, 최린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후 나혜석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혼고백서’를 발표합니다. 이 글에서 나혜석은 남성중심의 조선사회를 통렬히 고발하며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관념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친 그녀는 여전히 남녀 불평등이 강요되는 사회에서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합니다.


※ 참고자료
『나는 누구인가 -자화상에 숨은 화가의 내면 읽기』전준엽, 넥서스, 2011
『화인열전1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유홍준, 역사비평사, 2001
네이버 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
Self-Esteem (네이버 블로그)
http://armada0219.blog.me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조은미 -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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